석동광큰스님(실상연화종 현광사)/석동광 큰스님 법문[法文] 법어[法語

무량의경 덕행품 제일③- 의멸(意滅) 식망(識亡) 2006/09/28

원행화 2015. 4. 20.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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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의경 덕행품 제일- 의멸(意滅) 식망(識亡) 2006/09/28

 

동광스님

 

묘일 석동광

깨닫기 위한 둘째 단계.

성문 연각인 소승의 경계에서 또 한 단계 올라서게 되면 깨달음의 경계인 대승보살의 경계가 나온다. 번뇌에 집착해 있는 사람을 이끌어 주는 것이 보살로서의 대승을 행하는 사람이다. 나 혼자 잘되겠다고 좋은 법문 들으러 다닌다 하면 그것은 소승이라 하는 것이다. 내 가족과 친구와 이웃 등 인연 있는 이를 데리고 온다 하면 대승의 보살행이 되는데 우리는 반드시 대승행을 해야 한다.

내가 대승행을 하면 다른 사람도 대승행을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대승행을 하게끔 이끌었으면 나 또한 역시 같이 행을 해야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차별의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고. 너도 나도 같이 성불하자. 이것이 대승보살 행이다. 이것이 곧 진정한 자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르게 믿지 않는 사람은 우선 눈에 보이는 그것만 가지고 행동하지만 정말 마음속에서부터 믿음이 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선한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다. 우리는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과 구원 받고자 하는 사람을 차별하는 그 마음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자비심을 행하는 부처님으로서 대성주가 될 수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덕을 갖추신 분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게송으로써 찬탄하는 것이다.

원문에 의멸식망심역적(意滅識亡心亦寂), 뜻도 멸하고 식도 없고 마음 또한 적멸하다.

'뜻이 멸한다' 에서 뜻[]이라고 하는 것은 제 6(六識)을 말한다. 6식은 5(五官:····)의 작용을 종합해서 사물의 존재를 아는 작용을 한다.

눈으로 보아 오늘 몇 명이 강의를 들으러 왔는데, 정말 열심이 듣는 사람이 있고, 열심히 듣지 않는 사람도 있고, 말하자면 가지각색임을 안다. 그러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보아서 왜 그런가 하는 것까지도 아주 제대로 알아야 된다.

중생들은 눈 귀 코 혀 몸, 이 오관이 작용하지만 그것으로 오만 가지 잡다한 번뇌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오관을 도둑이라 하는 것이다. 오관으로 좋은 것만 하고, 좋은 냄새만 맡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듣고, 어떻게 하든 좋은 마음으로써 행동을 하면 좋은데,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급급해서 죄를 자꾸 짓고,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오관은 임시로 사대가 잠시 모여서(인연) 이루어진 것이라 죽으면 흩어져 없어지는 무상한 것이다. 이러한 오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인 참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법문을 남기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바로 오관으로 인해서 집착이 되어 세세생생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투철하게 알아 오직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이 사바국토에서 자유롭게 존재하는 그러한 내가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불법에 들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흔히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따라서 동물은 6가지 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람은 9가지 식을 가지고 있다.

오관을 전 오식(五識)이라하고, 위에서 말한 의()를 더하면 6(六識)이 된다.

여기에 칠식(七識)인 말라식, 팔식(八識) 아뢰야식, 구식(九識) 암마라식까지 9식이다. 이것은 유식론(唯識論)인데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의식을 다룬 것이다.

7식 말라식은 사량(思量)식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현재 과거 미래를 분별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말라식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없으면 얻어먹고, 있으면 계획 없이 마구 써버리고 하는 것은 말라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현재나 미래나 과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줄 알아야 된다. 이 말은 과거에 대한 잘못한 부분은 고치려고 해야 된다는 것이지 과거에 집착하라는 뜻은 아니다. 현재와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8식인 아뢰야식은 말라식의 그 경계에서 한 단계 올라선 경계이다. 이것을 장(), 또는 오장장이라고 하는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성질, 이것을 생각해서 바르게 아는 것. 이것이 아뢰야식이다.

사람은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과 공존하고 있다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윤리 도덕만으로 만족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을 알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경계가 바로 제8식 아뢰야식인 것이다.

9식 암마라식은 청정한 경계를 뜻한다.

윤리와 도덕만으로 만족하게 되면 청정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윤리 도덕을 외치다 보면 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누누이 버리라고 하신 그 아상(我相)이 높아진다. ‘내가 내다하는 이것을 일상에서 지나치게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은 절대적인 깨달음의 경계를 맛볼 수가 없다. 청정함을 얻어서 잘못을 완전히 벗어난 절대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청정한 깨달음이 즉 암마라식인 것이다.

아라한의 경계로서 암마라식까지는 맑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암마라식 그 이상 없다 하고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암마라식은 아라한과를 얻는 정도의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암마라식의 경계도 초월해서 보살의 경계에 들어서 보살도를 닦아서 바로 부처님 지혜에 들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모든 법의 실상을 안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근본을 아는 작용, 이것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안다 하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금만 닦아 나가면 말라식의 경계는 금방 쉽게 들 수 있다. 그러나 팔식까지는 조금 어려워진다. 아주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아뢰야식과 암마라식을 얻을 수 있다.

말라식을 초월하게 되면 팔식, 구식이 발달해서 자신의 일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라한의 경계인데, 팔식과 구식이 발달하게 되면 그 결과로써 어떠한 환경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으시고, 또 어떤 환경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시는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9(九識)을 초월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의멸(意滅) 식망(識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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