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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덕행품 제일⑨>경계의 맛을 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

원행화 2015. 4. 20. 22:30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덕행품 제일⑨ 경계의 맛을 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pdf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덕행품 제일>경계의 맛을 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

2007/04/12

 

동광스님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덕행품 제일>

경계의 맛을 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

묘일 석동광

유문혹득수다원 사다 아나 아라한 무루무위연각처 무생무멸보살지(有聞或得須陀洹 斯陀 阿那 阿羅漢 無漏無爲緣覺處 無生無滅菩薩地), 듣는 일이 있으면 혹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와 새는 것이 없고 함이 없는 연각의 곳과, 남이 없고 멸이 없는 보살지를 얻는다.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 사제와 육도와 십이인연을 중생의 마음 즉 심업에 따라서 설하시는 것을 들으면 한량없는 생사의 모임을 끊게 된다. 그러므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는다.’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점차적으로 깨달아 들어가게 되는 순서를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면 제일 처음 수다원을 얻고, 사다함을 얻고, 아나함을 얻고, 아라한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례로 깨달아 가는 순서가 성문지, 연각지, 보살지인 것이다.

성문의 경계인 성문의 지혜는 부처님의 설법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실천하여 자기 자신의 미혹한 마음을 없애는 수행의 결과로 인해서 차례로 네 가지의 과를 얻게 되는 경계이다.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과를 얻는 것이다. 스스로 이 네 가지 경계를 얻고자 하면 바르게 듣고 믿으며,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실천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경계가 수다원이다. 부처님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믿음이 확고하게 생기는 경계, 이것이 수다원이다. 이 경계를 삼계의 미혹을 탕진한 성문의 과위라고 한다. 수다원을 얻고 나서 수행을 지속하게 되면 사다함을 얻는다. 수다원을 얻었다 해서 그곳에서 수행을 중단하고, 부처님을 믿는다는 마음만 가져서는 안 된다.

스스로 수행은 하지 않고, 기도도 스님에게만 맡기는 것은 수다원의 경계에서 머물러 버리는 것이 된다. 또한 그것은 자기가 게으른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기복의 마음으로 자기 발전에 이익이 없다. 중생들이 궁극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성불임을 잊지 말고, 기복의 마음에서 벗어나 바른 실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낮은 한 법의 깨달음을 얻었다, 수다원을 가졌다, 믿는 마음을 가졌다 해서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믿는 마음 자체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잊어버리는 것이 중생심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몸이 아픈 사람이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차도가 보이면 이제 되었다 싶고, 나아가 스님이 해 주시는 것조차 별것 아니게 느껴져 시간이 조금 흐르면 믿는 마음까지 없어져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경계가 사다함의 경계이다. 물러날 수 있는 경계. 믿는 마음에서 다시 수다원의 마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경계. 이것이 사다함의 경계이다.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그렇게 된다.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지속적으로 수지행을 하면 다시 아나함의 경계를 얻는다. 이 아나함의 경계에 들면 다시 범부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일단 범부 중생의 자리에서 벗어난다. 작은 것을 얻어도 즐겁고 환희를 느끼게 된다. 또 아무리 작은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의 뜻이 움직이지 않는다. 견고해지고 신심이 생겨난다. 설사 나한테 장애가 생겼다 하더라도 빨리 분별하게 되어 그 장애를 쉽게 극복해 버릴 수가 있다. 그런데 장애라 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법을 하는 데도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게 되면 그건 법을 믿은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사고에 의해서 다만 믿는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아나함의 경계에 올라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나함의 경계는 오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 움직이지 않는 경계. 흔들리지 않는 경계가 아나함의 경계이다.

아나함의 경계에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경계에서 다시 지속적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아라한과를 얻는다. 아라한은 일명 살적이라고도 한다.

모든 번뇌 망상을 다 끊어 버리는 것이 살적의 경계이다.

이 네 가지 행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첫 번째 성문의 경계가 된다.

성문의 경계를 완전히 얻게 되면 다음 단계인 연각의 경계에 오르게 된다.

연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가지가지 인연의 모든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또 다시 생겨나는 그러한 모든 세상의 일들을 깨달아 가는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의 사물과 생명 있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시시때때로 변한다.

우리 생명도 나기 전까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면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가는 경계, 이것이 무루무위 연각의 경계이다.

미혹한 경계로 미혹한 마음은 유루다. 미혹한 경계는 중생의 경계인데 중생은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걸 생각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라는 존재자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경계가 없어진 상태, 미혹함이 없어진 상태, 이것이 무루다. 이 미혹한 중생의 마음이 없어지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없어지는 경계가 연각의 경계다.

연각의 경계에서 한 단계 올라서면 보살의 경계가 된다. 무생무멸보살지 - 남이 없고 멸이 없는 보살지를 얻는다. 연각의 경계에서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보살의 경계를 얻는다.

이 보살은 어떤 존재인가? 용감하고 씩씩한 마음으로써 정각을 구한다. 정각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즉 부처님과 같은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다. 그걸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분들이고, 또 중생을 구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을 구원하는 사람이 된다.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보살이 아니다. 그런데 겉으로만 중생을 구원하고, 속으로는 자기 이익과 재물을 탐하는 자는 보살이 될 수 없다.

보살은 교만하지도 않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비겁하지 않다. 어떠한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모든 여건이 변화를 한다 해도 거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경계. 이것이 보살의 경계이다. 어떤 협박을 받든지, 위협을 가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이 법을 위해서는 부동심으로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흔들림이 없는 사람, 이것이 즉 보살이다. 이것을 무생무멸보살지라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수시로 말하지만 법화경에 들어오면 바로 보살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화경에 들면 일단 초입의 보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을 닦아 나가면 바로 보살의 과에 완전히 들게 된다. 즉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되고, 내 중심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고 내 힘과 권력으로 해서 내 주장대로 강행하면 그것을 먹기 싫은 사람은 힘이 없기 때문에 따라가야 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힘이 있고 권력이 있더라도 먼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 하고 물어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보살이 되면 마음이 늘 즐겁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고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즐거우면 육체적 쾌락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법화경을 하는 사람은 이 정도의 경계는 오르려고 노력을 해야 될 줄 안다. 그러면 내 가족이 잘된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모든 일에 만족하게 된다. 그런 경계의 맛을 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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