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봉은사 법화경 9강 1부(2012.07.15) 천도재, 비유품
금년도 백중을 맞이하면서 백중 49일 기도입재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법화경』정기법회일이기도 합니다. 백중이라고 하면은 돌아가신 선망부모를 위해서 저희들이 부처님법에 의해서 간절하게 지장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의 힘으로 언제 돌아가셨든 상관없이 천도를 드리는 그런 그 의식입니다. 불교에서 49재를 잘 지내면은 그걸로 끝나는게 아닌가? 이런 그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얼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마는 사찰에서 왜 돌아가신지 10년, 20년, 30년, 40년 이렇게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자주 이렇게 천도재를 매년 지내는가? 그런 대목에서 조금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서 태어났습니다. 내 자손들이 또 여러분들 자손들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자손들이 어디선가 또 천도재를 오늘 이 순간 법왕루에서 지낼려고 동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미 태어나서 이렇게 여여하게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같이 사회생활을 하지마는 남아있는 자손들이 끊임없이 천도재를 지내고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이미 태어나서 40, 50, 60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술술 잘 풀립니다. 자기 노력들인거보다도 오히려 훨씬 순조롭게 일이 잘 풀린다는 사실. 그런 경우가 많죠. 그런데 그 반대로 아무리 아둥부둥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어딘가 자꾸 가시에 옷깃이 걸리는듯이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가 우리 자손들이 지금 우리 자손들입니다. 우리 자손들이 어디선가 천도재를 때때로 지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기도의 힘에 의해서 현실의 우리가 쉽게 모든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그러니 자식된 도리로서 이미 돌아가신지 뭐 10년, 20년, 30년 됐다 하더라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통해서 이러한 이치를 안 이상은 동참해서 작은 정성이나마 이렇게 지내드리는 이것이 자손으로서 할 수 있은 아주 최상의 도리이고 또 그로 인해서 이미 태어나서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람의 삶이 그 부모의 삶이 순조롭고 모든일이 쉽게 풀린다고 하는 이 이치 이것을 우리가 이해한다면은‘아~ 천도재라고 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은 우리가 살아있는 우리나 사실 따지고보면 우리도 영가에요. 전생에 우리가 죽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 모두가 영가입니다. 또 우리가 지내주는 저 위패에 저 등에 많이 올려져있는 선망부모님들 그 영가, 살아있는 영가나 이미 태어나있는 영가나 돌아가신지 얼마되지 않은 영가나 모든 영가가 왜 영가인가? 어떻게하면 영가의 세계에서 진정 참생명을 구가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 천도의 길을 과연 무엇인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정말 아주 평탄하고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그런 아주 평탄한 천도의 길은 과연 무엇일까? 음 우리 지금도 국민선사, 한국의 대표선사로 추앙받고 있는 성철스님께서 출가하기 전에 동서고금의 많은 책을 보시다가『채근담』을 만났습니다. 그『채근담』이라고 하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아유일권경(我有一卷經)하니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이라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인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무슨 말인고 하면은? 우리 모두에게 한 권의 경이 있다. 그런데 그 경전은 종이와 먹으로 된 경전이 아니다. 그래서 종이와 먹으로 된 경은 펼치면은 글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와 먹으로 된 경이 아닌 까닭에 펼쳐봐야 글자 하나 없더라. 그러면서 常放大光明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다 라고 하는 이 구절을 읽다가, 야~ 우리 모두에게 한 권의 경이 있고 그 경전은 진정 참 생명이고 우리의 주인공이며 자성자리인데 늘 광명을 놓고 있는 살아움직이는 진정한 참 생명 이것을 찾아서 정진하기 시작하고 비로소 출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출가동기가 바로 그 한 구절이에요.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참 생명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 참 생명의 경전 늘 큰 광명을 놓고 있는 그리고 육근을 통해서 온갖 신통묘용을 발휘하고 있는 그 경전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거기에 눈을 뜨면은 우리가 진정 살아있는 사람이고 영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참 생명, 개개인이 다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전에 이해가 없고 느낌이 없고 거기에 결국 눈을 뜨지 못한다면은 우리는 영원히 천도받지 못한 영가로 있을 뿐입니다. 진정 영가를 천도하는 길은 바로 그 경전, 그 참 생명을 바로 보고 이해하는거. 그것이 우리가 불교를 통해서 진정 바르게 천도하는, 탄탄대로와 같이 우리들 자신의 영가 그리고 우리가 천도하려고 하는 그 모든 영가를 진정으로 천도하는 길이라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오늘은『법화경』「비유품」세 번째 품「비유품」의 내용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경전중에 왕이라고 하는 이『법화경』은 수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여기서 이제「비유품」이라고 한 이름을「비유품」이렇게 할 정도로 중요한 비유가 있고 그 다음에 또 이제 많은 비유가 있죠.「신해품」에 가면‘궁자의 비유’못난 자식의 비유 이런 그 비유도 있고 그 다음에 또「약초유품」이라고 하는‘약초의 비유’라고 하는 그런 품도 또 있고 그 다음에 이제 화성(化城) 변화하여 만든 도시 환상으로 변화하여 마술을 부리듯이‘변화하여 만든 도시의 비유’라고 하는「화성유품」이 또 있어요.
그 뿐만 아니라‘계주의 비유’라고 해서 친구에게 평생 마음껏 쓰고 남을 그런 그 아주 값진 보배를 몸 속에서 주머니에 넣어 줬습니다.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 준 그런 그 계주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여러 가지 뭐 칠유(七喩)니 구유(九喩)니 또는 뭐 이십오유(二十五喩)니 하는 등등 수많은 비유가『법화경』에는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가 따지고보면은 참 생명, 우리들의 참 생명 처음 말씀드린 한 권의 경전. 종이와 먹으로 돼지 않았으면서도 바로 이 순간도 저의 한 말씀 한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저 많고 많은 빗방울 소리까지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들을 줄 아는 바로 그 생명 그것을 바로 깨닫는 것. 이러한 길을 바로『법화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비유가 결국은 그 한 권의 경에 귀결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방편품」에서 정말 그 동안의 불교에서 보면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런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사리불께서 깨달음을 얻은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처음에 비유는 다음 법회 때 나올 차례고 순서상, 사리불이 그 엄청난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따른 그런 그 감회 그것을 이제 당신이 그동안 공부해온 내력과 그리고 깨달음을 성취해서 그 심정을 술회하는 그런 내용이 서두에 나와있습니다.
‘사리불이 깨달음을 얻다’오늘 법회지에 그렇게 이제 처음에 이제 나와있는데, 무엇을 들었기에 비로소 사리불이 깨달음을 얻었는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이후 40여년의 세월을 사리불을 가르치고 많은 중생을 가르쳤는데 왜 사리불은 이제 와서『법화경』설하는 이 자리에 와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는가?
그리고는 이어서 오늘 사리불이 수기를 받습니다.“너도 부처다.”라고 하는 이러한 수기를 받는 장면이 여기에 나오게 됩니다. 바로「방편품」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 와서 절 한 번 하는 그 사실, 그 사실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부처님 앞에 손 한 번 번쩍 든 것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南無佛’뭐 찬불가 길게 부를 것없이 그저‘南無佛’이 짧은 염불 한 마디로써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이렇게 돼있어요. 심지어 어린 아이들이 모래를 쌓아놓고 그것을 부처님의 탑이라고 이렇게 장난을 쳐도 그것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저 위에 미륵불 앞에 가서 들꽃 하나 뜯어서 올려놓고 예배 한 번 하면은 그것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이런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리불은 그동안 그런 이야기 못들었습니다.『법화경』에 와서 비로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이 무슨 수행이라고 할 것이며 그것이 무슨 공덕이라고 할 것이며, 그 많고 많은 육바라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별별 수행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무슨 육바라밀이 되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모래 쌓아놓고 이것이 불탑이다라고 장난친 것이 그것이 무슨 공덕이며 무슨 수행이며 무슨 바라밀이 되겠습니까? 하지마는 그 사실, 아이들이 장난치는 그 사실, 우리가“南無佛”하고 말 한 마디하는 그 사실 또 부처님 앞에 꽃 한 송이 올린다든지, 손 한 번 번쩍 든다든지 하는 그 사실에 그야말로 서두에서 말씀드린“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다. 그 경은 종이와 먹으로 돼지 않았다. 펼쳐봐야 글자 한 자 없지마는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다.”하는 바로 이 경전, 이 참 생명의 경전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손 한 번 들고 절 한 번 하고 염불 한 마디 하고 아이들이 모래 쌓아놓고 장난하고 심지어 번뇌망상이 우글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꽃 한 송이 올린 그 사실 그것이 바로 그 참 생명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 참 생명, 한 권의 경전이 들지 아니하면은 그런 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는데도 바로 참 생명 한 권의 경전이 들어서 이렇게 앉아있고 한 마디 말을 하는 것이나 말을 듣는 것이나 모두 그 한 권의 경이 들어있어서 그 작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표현입니다. 그 경전의 한 표현이에요.
이 사실 우리가 명확하게 안다면은 우리는 이미 천도되었습니다. 진정한 천도는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이 사실 모르면은 수천 수만 번 천도재를 지낸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은 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 또한 천도지내는 우리도 또한 영가에 불과합니다. 살아있는 참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 살아있는 참 사람 노릇을 할려면은 바로 이 사실에 눈을 뜨는 거에요.
마치 수많은 영(0) 제로(zero)를 천 개, 만 개를 나열해도 거기에 앞에 실수 1이 됐든, 2가 됐든 그것이 들어서지 아니하면은 0은 열 개, 스무 개를 나열해도 영원히 0일 뿐입니다. 제로입니다. 백 개, 천 개를 0을 써놔도 그것은 영원히 제로입니다. 근데 0이 하나가 됐든 두 개가 됐든 세 개가 됐든 그 앞에 실수 1이 됐든 2가 됐든 하나만 있으면 그 제로는 전부 생명을 발휘합니다. 전부 살아납니다. 10이 되고 20이 되고 30이 되고 100이 되고 1000이 되고 10000이 됩니다. 그 실수가 뭡니까? 실다운 숫자 그게 뭐겠어요? 그게 생명입니다. 참 생명이에요.
불교에서 볼 때 우리의 삶도 바로 이 실다운 숫자의 1이나 2와 같이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자리하지 못한다면은 우리의 삶은 헛 것이라는 것입니다. 0만 열 개, 스무 개 나열한 것하고 똑같은 사실이에요.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점을 우리에게 깨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우리의 삶은 영원히 영가로서 구천을 떠도는 것이고, 이 몸 가지고 이 생을 살아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거기에 실다운 숫자가 하나 자리매김한다. 말하자면 참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와 눈뜸이 있다고 한다면은 바로 그 사람은 당장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천도해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불이에요. 그것이 곧 바로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성철스님께서도 바로 그 점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로 이해하고 찾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고 하는 그런 그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염불을 하는 방법을 동원하던지『법화경』을 동원하던지 참선을 동원하던지 무엇을 다라니늘 동원하던지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각자 체질에 맞고 성향에 맞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바로 참 생명이라고 하는 것, 참 사람이라고 하는 것 항상 대광명을 놓고 있는 그 사실에 눈을 떠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리불은 바로 그 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사리불이 깨달음을 얻다’라고 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점이고 앞에서 들은 법문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내용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사리불이 뛸 듯이 기뻐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부처님의 존안(尊顔)을 우러러보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이제 사리불 천하에 참 부처님의 오른팔과 같은 그런 그 상수제자의 심정을 술회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세존께 이러한 법문(法門)’
이러한 법문이 뭡니까? 다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보고 듣고 앉고 눕고 가고 오고하는 이 사실, 이 사실이 곧 참 나며 나의 참 생명의 현현(顯現)이다라고 하는 이 법문을
‘이 법문을 듣고 마음이 크게 기쁘고 전에 없던 일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 보살들은 수기(授記)를 받아 성불하리라 하였으나, 저희들은 그 일에 참여하지 못하여 매우 슬프고 상심하여 여래의 한량없는 지견(知見)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보살들은 수기를 받아 성불한다라고 하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이 열린 사람은 그 순간 바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했고 사리불같은 이런 소승들은 그 자리에 똑같은 법문을 듣고 있었지마는‘이것은 나하고 관계없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한거에요. 그렇습니다. 어떤 상황도 어떤 상황도 상황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눈을 뜨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릅니다.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와 같이, 비가 오는 날‘참 비가 와서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거에요. 그런데‘아 이거 비가 와서 짚신이 안 팔리니 어쩌나?’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사리불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수준높은 사람들은 똑같은 법문 듣고 이미 견성성불 다 했어. 그런데 자기는‘아 이 법문은 나하고 관계없는 것이다’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거요. 그 고백을 이제 와서 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항상 산림(山林)에나 나무 밑에 홀로 앉기도 하고 거닐기도 하면서 생각하기를, 우리들도 법의 성품에 함께 들어갔는데’
전부 법성(法性)이에요. 전부 불성(佛性)이에요. 전부 진여(眞如)에요. 우리 공히 똑같이 누구나 할 것없이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뭐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이든 불교에 무슨 뭐 해꼬지를 하는 불교를 폄하하는 그런 그 입장이 있든간에 누구든지 법의 성품이 함께 들어있다. 근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소승법(小乘法)으로 제도하시는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거요. 스스로
‘이것은 우리의 허물이요, 세존의 탓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요. 세존의 탓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엔 항상 태양이 떠있습니다. 눈 밝은 사람은 밝은 태양을 봅니다. 하지마는 눈 어두운 사람은 태양이 수백 번 떠도 항상 세상은 캄캄합니다. 그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태양의 잘못이겠습니까? 눈 어두운 사람의 잘못이겠습니까?
‘그 까닭은, 만약 저희들이 성불의 원인까지 말씀하시기를 기다려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였더라면, 반드시 대승으로써 제도하였을 것이지만, 저희들은 방편으로 마땅함을 따라 말씀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법문을 처음 듣고는 곧 그대로 믿어서 결과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오늘도 그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입재식이 돼놔서 이『법화경』을 앞에 놓고 있다 보니까 또 한 가지 천도와 연관된『법화경』이야기를 들려 드렸으면 합니다. 천도하면『법화경』이에요. 천도하면『법화경』입니다. 왜냐? 경중의 왕이기 때문에, 그래서 옛날에 어떤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 부모님을 천도시켜드릴려고‘『법화경』을 사경을 하면 부모님이 천도된단다’이러한 말을 듣고는 없는 돈, 있는 돈 몇 년간을 모아가지고, 자기는 뭐 옛날에 유식한 사람이 별로 없었잖아요. 거의 뭐 90% 이상이 문자를 모르고 살았으니까. 그때 아주 아등바등 벌어가지고 글씨를 쓸 줄 아는 사람에게다가 품값을 한 번 대가지고『법화경』을 한 번 사경을 할려고, 그래도 부모님을 위해서 사경하는 일이니까, 뭐 남을 시켜서 사경을 하거나 그런 말도『법화경』에 있어요.
그래서 이제 돈을 모아가지고 시장에 가서 종이를 사왔습니다. 한지 좋은 종이를 몇 년 돈을 모아가지고『법화경』한 벌 쓸만치 종이를 사왔어요. 그래서 참 가슴이 아주 흐뭇하고 기분도 아주 좋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래서 그 종이를 고이 싸가지고 머리맡에 두고‘이 종이를 내일은 어느 마을에 어떤 선비에게 내가 부탁을 해서 저희 부모를 위해서『법화경』을 한 권을 사경시킬 것이다. 그리고 품값은 내가 얼마나 드리고 올 것이다’이 생각을 하면서 머리맡에다 종이를 두고 잠을 잤는데 그 날 저녁밤 꿈에 부모님들이 나타나가지고“너희가 나를 위해서『법화경』을 사경하기 위해서 그동안 돈을 모아서 시장에 가서 종이를 사왔다면서 나는 그것만으로 이미 천도되었노라. 그 인연공덕으로 나는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꿈에 현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법화경 영험록』에 다 나와있는 내용입니다.『법화경』을 사경하기 위해서 아직 갖다 주지도 않았어요. 한 장도 쓰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몇 년간 돈을 모아가지고 종이를 사왔을 뿐인데,『법화경』사경하기 위해서 종이만 사놔도 천도된다니까. 무서운 경전이에요. 이게『법화경』이, 대단한 경전입니다. 그래서『법화경』은 비요지장(秘要之藏)이라. 부처님의 비밀하고 요긴한 창고다 그랬어요. 비밀하고 요긴한 창고다.
제가『법화경』을 이렇게 번역을 하고 강설을 하고 법회를 하고 하지마는 이거 100분의 1, 1000분의 1 그 내용을 알는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그래 내 나름대로 내 들은만치 내 상식만치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정말 무궁무진한 의미가 이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서 뭐‘법사『법화경』이야기하는데 뭐 인불사상(人佛思想) 사람이 곧 부처다. 당신은 부처님 뭐 이런 것으로써 일관되게 말씀하시는데 내 그건가 보다’천만의 말씀이죠. 그건 내가 본『법화경』일 뿐입니다. 부처님 마음에 드는『법화경』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이『법화경』신비한 경전이고 아주 비밀한 경전이고 그래서 경중의 왕이다. 이런 이야기가 경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는 모릅니다마는 그렇게 영험록에는『법화경』하기 위해서, 경전을 쓰기 위해서 종이만 사다놨는데 이미 그날 저녁에 천도됐더라 라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순박하게 순수하게 믿고 하다 받아들이면은 받아들이는대로 일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못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들으면은 또 부정적인데로 흘러갑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내 마음 쓰기에 달렸다. 모든 것이 내 마음 쓰기에 달렸으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흘러갈 것이고 긍정적으로‘이야 그렇구나. 당장에 나가다『법화경』한 권 사가지고 가서 집에 가서 노트에 써야지’한글로 돼있으니까 천하에 어떤 바보가 한글로 된『법화경』못 읽고 못 쓰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당장에 이제 이런 말 받아들여가지고‘야~ 이번 49일동안 부모를 위해서 진정 제대로 천도 한 번 해보자’이런 마음으로『법화경』을 사경을 한다면은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그렇게 흘러가는거에요.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입니다.
부디 그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유심조의 원리라고 하는 사실 이걸 잊지마시고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