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해스님은 알려진대로 동국대 종비생 1기로 불교학 석사를 마친뒤 10년간 일본 고마자와대학과 와세다 대학에서 동양철학과 천태학 등을 연구한 대학자. 특히〈법화경〉에 관한 최고 권위자다.
스님은 불교에 대해 ‘부처의 세계’를 따로 있다고 상정해서는 안된다며 ‘깨침’과 ‘깨치지 못함’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이 세계가 부처의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직시해야한다고 했다. “불교를 어렵게 이야기하면서 견성 성불만을 강조하는데 깨침이라는 부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의 세계가 따로 있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이 따로 있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불자들은 발심수행장부터 읽어라
“깨침이란 것은 현실을 바로 직시(정견)하고 거기서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즉 현실에서 나도 바로 살고 남도 바로 살게하면 그것이 부처의 세계인 것입니다. 만약 견성성불해서 부처의 세계가 따로 있다면 그것은 중생들과 다른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쓰기에 따라서 이땅이 극락이 될 수도 지옥이 될수도 있음을 강조하는 스님은 “법화경에 나오는 본래의 모든 법은 적멸상이라 즉 부처님의 세계라. 부처님의 제자들이 온전히 행하면 다음 세상에 부처가 될 수있다는 구절을 신도들에게 즐겨 이야기합니다. 저는 다음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부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사람들 마음에 모두 부처를 갖고 있으면 부처인 것입니다. 그릇에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고, 장을 담으면 장그릇이고, 똥을 담으면 똥그릇이듯 내 속에 부처를 담으면 부처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라고 늘 신도들에게 가르친다.
불교는 신앙과 달라…현실을 바로 보고 듣고 깨달아야
나도 바로 살고 남도 바로 살게하면 그것이 부처의 세계
“바로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하라”고 가르치는 스님은 “작은 욕심 즉 탐진치에 사로 잡히지 말고 대국적인 입장에서 보면 안목이 넓어져서 바로 볼 수있다”며 여실지견(如實知見)을 강조했다. 부처님께서는 “소문이나 전래되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럴 듯한 겉모습이나 공허한 논리에 현혹되지 말라”고 하셨다. 불교는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보고 듣고 깨달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바로 볼 것을 강조한다.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한다. 알지 못하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공부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스님 스스로가 온갖 역경을 딛고 법을 공부했다. “처음 출가했는데 무작정 천수부터 배워라고 하길래 왜 하느냐고 물으니 야단만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처사분이 불을 때면서 발심수행장을 읽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구절구절이 마음에 확 와닿길래 스님께 말씀드려 서울서 책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계초심학인문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발심하게 만들고 단계적으로 공부하게 해야 제대로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도 행자들에게 발심수행장부터 읽게합니다”
스님은 강원제도에 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현행 강원제도 과정은 300년전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치문 사집 사교 대교 과정은 선에 입문하기위한 과정인데 지금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집반에서 배우는〈서장〉〈도서〉〈선요〉는 모두 선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도서는 〈화엄경〉을 선의 입장에서 쓴 논문인데 어떻게 기초도 배우지 않고 논문부터 볼 수가 있습니까. 본래 부처님 말씀은〈아함경〉부터 시작해서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하는데 현행 강원 교과과정은 이 원칙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못하게 되고 부처님을 모르다 보니 그 세계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역대 조사 선지식 들은 모두 엄청나게 많은 경전을 보고 공부한 뒤 그 바탕위에서 사교입선(捨敎入禪)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스님은 종단에 대해서도 “요즘 종단이 문제가 많다는데 쉽게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행위의 실천원리인 윤리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로 현대사회의 관습적 윤리 도덕과 가치론이나 수행론에 입각한 윤리의 차이와 방향 등에 관하여 세심한 교육이 있어야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강원교육도 아함경부터 단계적 공부해야
월정사는 한국전쟁으로 전소되기 전 17개동에 이르던 대찰. 조선조 때는 최대 32개동까지 있을 정도였다. 92년 월정사 주지로 취임할 당시는 13개동까지 복원됐었다. 그후 10년이 넘는 동안 무량수전 박물관 등 23개동으로 늘였다. 불타기 전의 규모보다 훨씬 커진 것이다. “취임할 당시 월정사는 3대 숙원사업이 있었습니다. 상수도를 설치하고 진부와 서울에 포교당을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를 이루어놓았습니다” “앞으로는 신도들이 절에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라는 스님은 “신도들을 위한 수련시설을 건립하고 나서 스님들 요사채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전문강원을 만들어 연구비를 지원, 스님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있고 새로운 방식의 커리큘럼을 제정하겠다는 것이 스님의 복안이다.
월정사=박부영 기자 3Dchisan@ibulgyo.com">chisan@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3Dair501@ibulgyo.com">air501@ibulgyo.com
/ 현해스님은
숱한 시련딛고 日유학까지
법화경 최고권위 대강백

스님은 초발심 시절 맹장염으로 죽을 고비를 맞기도했다. 절 살림이 가난했던 탓에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스님들의 간호도 받지 못하며 고통만 날로 더해가자 스님은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주력을 하며 죽기로 했지. 며칠을 그렇게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다가 잠이들었어. 꿈속에서 어린아기를 업은 한 여인네가 대나무를 끌고와서는 왕대이파리 세 개만 먹으면 되지 하는거야. 그러다 잠이 깼는데 그 목소리가 하도 생생해서 이파리를 끓여먹었지. 그전에는 곡기 냄새도 못맡겠더니 대나무 즙이 목으로 넘어가면서 몇 달을 괴롭히던 병이 싹 나았어”
그뒤부터 “도를 구하기 위해 출가한” 목적을 이루기위해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적멸보궁에 올라간 스님은 21일간의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무장공비가 출현해 해가지면 경찰이 입산을 통제하던 때였다. 낮에 경찰이 무섭지도 않느냐며 걱정을 할 정도였지만 스님은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곡기를 끊으니 식이 맑아지면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들리는 거야. 몸도 가벼워지고” 원주를 맡아 어려운 절살림을 꾸리고 대중스님들을 봉양하던 스님은 공부를 하기위해 해인사 강원으로 갔다. 하지만 당시 강원 학인들의 연령은 기껏해야 13~18세로 이들보다 10살이나 더 많았던 스님은 학인들이 “누구네 은사스님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차마 공부하러 왔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울로 직행, 이듬해 종비생 1기로 동국대에 입학한다.
은사스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학교에 들어가 학비지원을 받지 못했던 스님은 절 부전을 살며 학비를 마련하는등 수많은 고생을 했다. 차비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때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길거리서 잠을 자야하는 등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끝내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강사가 된 것이다.
일본 고마자와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10년간 법화경 연구에 몰두한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과 동국대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91년부터 월정사 주지를 맡아 가람수호와 포교에 헌신하고 있다.
출처 : 염불로 가는 극락세계
글쓴이 : 진언행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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