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묘법연화경 법문

[스크랩] 봉은사 법화경 8강 1부(2012.06.17) 방편품

원행화 2013. 4. 18. 10:54

저희들이 공부하고 있는『법화경』은 자고로‘경중의 왕이다’라고 일찍이 그렇게 이제 평가가 돼있어서 역사적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법화경』을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용들을 글로 많이 남겼습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된『법화경』해설서만 하더라도 지금 무수히 많습니다. 그 정도로『법화경』은 연구할거리가 많고 또 의미가 심오하다보니까 많은 분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법화경』에 대한 해석과 아울러서 이 세상과 또 우리들 자신 그리고 부처님을 해석하는 길이기도 한 그런 내용인데, 흔히 적문(迹門), 본문(本門) 이런 표현인데 자취 적(迹)자, 문 문(門)자, 근본 본(本)자, 문 문(門)자 또 그것을 적불(迹佛), 본불(本佛) 자취로서의 부처님 또 본체로서의 부처님 거기다 저는 더하여 적인(迹人), 본인(本人) 이런 표현도 씁니다. 자취로서의 사람 또 우리들 본체, 본체로서의 우리들 사람 이렇게 이제 해석하는 길인데,『법화경』을 대개 이제 부처님의 그 세계를 자취로서의 해석 그것은 요즘말로 하면은 역사적인 부처님 이런 뜻이죠. 또 본문, 본불, 본인 이런 말은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궁극의 차원에서의 사람, 궁극의 차원에서의 부처님 이런 표현이에요.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부처님과 또 궁극의 차원에서의 부처님 그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뭐 부처님을 두고 이야기를 하면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우리들 자신에 이끌어서 설명을 드리면은 우리들 자신도 지금 나이가 뭐 얼마다, 몇 년도 몇월 며칟날 어떤 가문에서 태어나서 오늘 이 순간까지 내가 나이를 몇 살 먹고 사회적 경험은 어떻게 쌓았고 사회교육은 어떻게 받았고 그리고 직업은 뭘 가지고 있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옷은 어떻게 입었고, 이러한 것은 현상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역사적인 사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건 각각 다릅니다. 사람마다 다 달라요. 부처님도 각각 다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런데 본불 또는 본래의 부처님, 본래의 사람 그것은 뭔고 하니? 사람으로서도 궁극적 차원에서의 사람. 이 눈 앞에 펼쳐져있는 이런 차별된 역사적인 우리의 모습하고는 다르게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만 평등한 것이 아니라『화엄경』에서 말씀하셨듯이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이 셋은 차별이 없다 라고 이야기한 바로 그 자리 그것이 궁극적 차원입니다. 그 궁극적 차원의 우리는 부처님과 동일한 자리에요. 그것은 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얼른 쉽게 알아듣습니다마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은 쉽게 알아듣기가 어려워요. 도대체 눈 앞에 펼쳐져있는 나 말고 궁극적 차원의 나란 무엇일까? 뭘 가지고 지금 하는지? 마음을 두고 하는건가? 상당히 의문스러울것입니다. 얼른 잡히지 않으니까. 역사적인 차원의 나는 뭐 눈에 보이는 것이고 살아온 내 인생 경험 그대로를 두고 하는 소리니까 뭐 이건 뭐 간단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사람이라고 하는 그 존재의 내용은 그리고 우주 삼라만상의 눈에 보이는 것 아닌 본질적인 입장에서의 그런 내용 이런것들이 깨달으신 분에게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말씀을 아니할 수가 없어요. 사람을 보고도 어떤 역사적인 입장에서의 그 모습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눈뜬 사람으로서는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궁극적 차원의 사람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 사람이 본래로 가지고 있고 또 누구에게나 다~ 평등한 심지어 부처님하고 사람하고도 조금도 차별이 없는 바로 그러한 경지가 너무나도 크게 떠오르기 때문에 이점을 무시하고 부처님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특히 이 대승경전『법화경』같은데서는 그런 점을 많이 부각을 시킵니다. 왜냐? 당신 눈에는 그것이 더 크게 보이니까. 차별된 어떤 현상, 역사적인 우리들 모습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실은, 진정으로 문제가 되고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각각 차별한 얼굴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고 뭐 살아온 길이 다르고 하는 업이 다르고 이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본체적인 거, 궁극적 차원 이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부처님을 그점을 상당히 깊이 있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법화경』입니다.

 

그 그점은 뭐 간단하게 설명한다면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런 말을 하고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저의 모습을 보고 사물을 보는데는 한 마디로 나이가 몇 살이다 라고 하는 그 나이의 조건이 거기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나이 상관없이 봐요. 나이 상관없이 듣습니다. 그런 세계가 있잖아요. 또 남녀라고 하는 그런 조건으로 보고 듣고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말 듣는데 남녀조건이 있습니까? 승속(僧俗)의 조건은 더욱 없습니다. 아무 조건도 없이 듣고 보고 해요. 그 자리는 부처님이나 저희들이나 동등합니다. 평등해요. 그런 세계가 있잖아요. 그것이 부처님 눈에는 더 크게 보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차별된 이런 현상보다는 그런 본질적인 궁극적 차원 이것이 더 크게 보이고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을 우리는 동등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부처라고 우리가 이름하는게 어떻겠는가?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은 더 좋은 표현 써도 되겠지마는 부처라고 하는 표현보다는 더 좋은 표현 없으니까. 그래 궁극적 차원에서의 사람의 모습은 바로 부처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걸 이제 이『법화경』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고 그러면서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과 궁극적 차원을 넘나들면서 어떨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인도에서 태어나셔서 살아온 행적 그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니면은 전~혀 그것과는 상관없는 무수한 세월 또 무수한 부처님 이런 이야기들도 하고

 

그것은 곧 우리에게 이끌어다가 말씀을 드리면은 우리도 역사적인 그 모습으로 사람과 사람이 상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거하고 관계없이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의 모습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도 많아요. 그래서 마음과 육신이 둘이면서도 또한 하나고 또한 하나이면서도 또한 둘이고 어떨 때는 육신만 가지고 이야기할 때도 있고 문제삼을 때가 있고 어떨 때는 마음만 가지고 문제삼을 때가 있고 그래요. 그러면서 그것 마음과 육신이 서로 넘나듭니다. 아주 자유롭게 넘나들어서 이게 분별이 분명히 되지가 않아요. 어떨 때는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아니면은 어떨 때는 또 하나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러한 내용들의 경전의 말씀, 부처님의 깨달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 되고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그런 그 보람과 의미를 십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그 법회지에‘석가모니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이라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고 부처님을 이해할 때도 그리고 삼라만상을 이해할 때 꼭 그 눈에 보이는 차원과 아울러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궁극적 차원을 함께 이해하는게 바람직해요. 그걸 그 가치를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도 이해해야되고 상대의 그런 가치도 이해해줘야 됩니다. 아주 중요한거죠. 그 가치야말로 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치기 때문입니다.

 

47번, 48번은 생략을 하고 우리가 꼭 그 알아야 할 대목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역시 부처님의 역사적인 차원에서 표현한 내용인데, 49번 보면은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보리도량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고 또는 거닐면서 삼칠일 동안에 이러한 일들을 깊이 생각하였느니라.’

 

그건 이제‘이러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앞에서 이야기했는데‘괴로움으로써 괴로움을 버리려 하는 것 또 온갖 삿된 소견에 깊이 빠져있다. 또 부처님께서 제시한 고통을 끊는 법을 구하지 않는다. 중생들이 이렇게 살기 때문에 내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었다’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깊이 생각했다.

 

‘내가 얻은 이 지혜는 미묘하기 최상이며 제일이지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경지는 그 지혜는 참으로 미묘하게 최상 제일이다. 하지만

 

‘중생들의 근기가 암둔(闇鈍)하여 어리석고 눈 어두운 일에 즐겨 집착하는지라’

 

중생들의 근기는 어리석고 암둔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눈 어두운 일에 즐겨 집착하는

 

‘이와 같은 무리들을 어떻게 제도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였느니라’

 

중생들의 그 살아가는 모습 참으로 어리석어서 세상에는 분명히 바른 이치가 있어.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분명히 바른 길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어서 그 바른 편안한 길을 가지않고 말하자면은 바르지 못한 길을 가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죠. 그래 부처님이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서는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자비스러운 사람의 마음은요 이웃집이나 아니면은 뭐 신문지상에 나오는 불행한 사람들의 불행과 안타까운 기사만 봐도 마음이 아픕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해요. 부처님도 우리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고통받는 것을 보시고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이때에 여러 범천왕과 제석천왕들과 이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과 대자재천왕과 여러 천신 대중들과 그들의 권속 백 천 만 대중들이 공경히 합장하고 예배하면서 나에게 법륜 굴리기를 청하거늘’

 

그랬습니다. 이‘부처님께서 보리도량에서 나무를 바라보고 또는 거닐면서 삼칠일동안 생각했다’라고 하는 말은 6년고행 끝에 보리수 나무 아래서 정상적인 삼매에 들어서 일주일간 보낸 뒤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나서, 진리를 깨닫고 나서 당신의 진리, 깨달으신 진리는 너무 깊고 오묘하고 누구에게나 이야기해줄 수 없는 그런 이치라.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이걸 내가 중생들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가? 참 저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하긴 해야 되는데 할려고 하다 보니까 너무 차원이 달라. 차원이 너무 달라서 정말 함부로 이야기했다가는 오히려 중생들로부터 비방만 받게 되고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비방하는 죄를 범하게 될 것도 같고 그러면 차라리 법을 안 설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법을 설하지 아니하면 비방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이런 문제까지 생각을 했어요. 그 삼칠일동안이라고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7일씩 하고 이칠일 내지 삼칠일, 왜 일주일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불교에서는 모든게 다 정해지는가? 이것이요. 부처님이 일주일간 6년고행을 끝내고 아주 바른 선정에 들었습니다. 고 일주일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이었어요. 세속에 있어서는 향락주의에 빠져살았죠. 출가해가지고서는 고행주의에 빠졌습니다. 고행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서 깨닫고는‘아~ 향락의 삶도 올바르지 못하고 고행의 삶도 이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고 한 사실을 알게 되고는 비로소 니련선하에 가서 목욕을 하고 우유죽을 받아먹고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인 사람을 돼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서 말하자면 정상적인 선정에 들었죠. 그것이 일주일입니다. 그 일주일이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불교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 있다면은 석가모니께서 고행을 마치고 니련선하 강에서 착~ 목욕을, 6년간 목욕 한 번 안하던 그 몸을 딱 씻고, 또 아무것도 먹질 않아가지고 피골이 상접했던 그런 그 허기진 상황에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목동녀가 우유죽을 끓여다줘서 살리려고 했던거지 그가 뭐 수행잔지? 누군지? 알 바도 없습니다. 그저 죽어가는 사람 살리기 위해서 우유죽을 끓여다 줬던 것이죠. 그래서 그 우유죽을 받아먹고 그리고는 일주일간 정말 진정한 선정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주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칠일기도를 한다 뭐 삼칠일기도를 한다 뭐 칠칠재를 지낸다. 이 모든 칠자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그 불교의식이라든지 행사는 바로 부처님의 일주일간의 그 불교역사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진 그 일주일에 맞춰서 짜여진 것입니다. 거기에 맞춘거에요. 그와 같은 부처님 바른 선정에 들었던 그와 같은 시간을 우리도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던지, 선방에서 용맹정진도 일주일합니다. 딱 일주일해요. 일주일할 때 바로 그 부처님의 바른 선정을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거기에 의미를 두고 하는거죠.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역시 그렇고

 

그래서 그 일주일간 하고 나서 깨달음을 성취했는데 고민하기를‘이걸 내가 중생들에게 설법을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를 고민하기를 또 칠일, 칠일, 칠일 삼칠일했어요. 여기 삼칠일이라고 돼있잖아요.『법화경』에, 이렇게 분명히 근거가 다 있습니다. 삼칠일동안 그 고민을 하셨다는거죠. 그랬을때 뭐라고?‘제석천왕, 범천왕, 사천왕, 대자재천왕 이런 천신대중들이 권속 백 천 만 대중들이 공경히 합장하고 예배하면서 나에게 법륜 굴리기를 청하거늘’삼칠일동안 고민하고 있을 즈음에 그런 청을 받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일불승만 찬탄하면 괴로움에 빠져 있는 저 중생들을 이 법을 믿을 수 없어서 법을 파괴하고 믿지 않는 까닭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니 내가 차라리 설법하는 일을 그만두고 빨리 열반에 들어버릴까도 하였다’

 

그랬어요. 이게 부처님의 그 당시 아주 고민입니다. 당신이 깨달은 것은 일불승(一佛乘)의 경지라.『법화경』표현을 빌리자면 일불승의 경지라. 모든 사람이 그대로 나와 동등한 부처의 경지라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런데 그 얘기를 그대로 깨놓고 하면은 믿을 사람이 없는거여.‘이 법을 믿을 수 없어서 오히려 부정하고 비방할 것이다. 그래 법을 파괴하고 믿지 않는다. 그러면 법을 파괴하고 믿지 않고 비난을 하다보면은 오히려 삼악도에 떨어지는 그런 우려를 범하게 된다’그래서 그 생각을 하니까‘내가 차라리 설법하기를 그만두고 빨리 열반에 들어버리겠다’

 

하~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이죠. 그러다가 진짜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버렸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정말 아찔한 순간입니다. 태자의 출신으로 출가를 해서 그~ 피나는 고행을 하셨고 피나는 고행은 뭐 설사 그렇다손 칩시다. 일주일간의 바른 선정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셨는데, 세상에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루셨는데 만약에 열반에 들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거 큰일날 일 아닙니까? 정말 우리가 뭐 이제사 늦게사 알아서 참 마음이 놓이고 다행이긴하지마는 만약에 그 순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었다하면 이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내용들 이『법화경』에 이렇게 피력을 했습니다. 이게 보통사건이 아닌거죠. 부처님의 깨달음은요. 서양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우리가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다’그래요.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다. 무슨 뭐 인류역사에 별별 큰 사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름없는 한 태자가 6년고행 끝에 깨달음을 이룬 어찌보면 지극히 미미한 일인데도 그 한 인간의 정신적인 혁명, 정신적인 변화 한 인간의 정신적인 변화 이것을 가지고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라고 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왜 인류사에 있어서 많고 많은 사건들이 있는데 한 인간의 정신적인 변화, 깨달음을 가지고 성취한 그것을 가지고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라고 하는가?

 

그건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든 인간들을 정말 죄업이 많고, 업장이 많고 불교식으로 얘기하면은 그리고 또 다른 종교의 표현으로 하면은 그저 죄 덩어리 아무짝에 쓸모없는 그런 그 존재 그러한 존재를 그러한 존재로 알았든 인간을 부처로 격상시키는 사건입니다. 모든 이를 이미 가버린 사람도 부처였었다. 이러한 사건 이전에 부처님이 오기 전 그 많고 많았던 사람들도 전부 이미 부처님의 깨달음을 통해서 전부 부처로 격상시켰어요. 현재 있는 사람도 모두 부처로 격상시켰고 또 앞으로 올 무수한 사람들까지도 한꺼번에 전부 부처로 격상시킨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한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인류사에 있어서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한꺼번에 부처로 격상시킨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다. 이렇게 표현하는거에요.

 

이건 이 동양권에서 표현하는게 아닙니다. 서양철학, 서양종교까지 다~ 섭렵한 사람으로서 그 다음에 동양의 어떤 그 문화라든지 동양의 종교라든지 동양의 철학 그런것까지도 다 섭렵하고 그리고 불교까지도 완전히 다 마스터한 입장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주 정말 적절한 표현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좀 깊이 고민하면서 그 의미를 좀 생각해보면은‘와~ 그 표현이야말로 진정 맞다’이미 가버린 사람, 현재 있는 사람, 앞으로 올 사람까지도 모두를 부처로 격상시켰으니까 무슨 저기 저 그 미화원을 말하자면은 대통령으로 격상시킨 사건보다도 더 큰 사건입니다. 더 청소부를 한순간에 그냥 대통령으로 격상시킨 사건보다도 더 큰 사건이 바로 이거에요.

 

부처님의 그러한 선언이 없었더라면은『법화경』과 같은,『화엄경』과 같은 이러한 대승경전의 이러한 선언이 없었더라면은 모르죠 또 우리 인간이 그렇게 격상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은 부처님이‘빨리 열반에 들어버릴까?’했다라고 하는 이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그런 그 순간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과거 부처님께서 행하신 방편의 일을 생각하고 내가 지금 얻은 도에 대해서도 삼승을 알맞게 말하리라 하였느니라’

 

‘삼승을’그러니까 사실은 모두가 부처의 삶인데, 부처의 삶인데 부처의 삶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가는 아무도 믿을 사람도 없고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따를 사람도 없어. 그래서 차원을 낮춰가지고 이것을 여러 가지로 쪼개고 나누어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겠다.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시방세계의 부처님이 모두 나타나서 아름다운 음성으로 나를 위로하며 깨우치시기를, 선재(善哉)라. 석가모니불 제일가는 도사(導師)여. 최상의 법을 얻어서 다른 여러 부처님이 행하신 것처럼 방편의 이치를 쓸지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전부 다 같은 음성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렇게 마음을 돌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찬탄을 하고 마치 뭐 어린 아이가 모처럼 착한 일을 했을 때 부모들이 칭찬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부처님이 칭찬을 했다.“그래 맞아. 일불승만 가지고 이야기하지 말고, 죄업 많은 중생이다 업장 많은 중생이다 너는 고통에 윤회하는 중생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너의 고통을 편안하게 해줘야지.”하는 이런 그 일상적인 삶속에서 자질구레한 그런 문제들, 그런 문제들까지도 다~ 낱낱이 치유하면서 그래서 궁극에 가서는 궁극에 가서는 인간의 궁극적 차원, 인간의 궁극의 차원을 드러내서 그런 역사적인 차원만 가지고 놀지 말고 나중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을 아울러서 다 함께 데리고 가면서 나중에 가서는 인간의 궁극적 차원, 궁극의 차원을 드러내서 이해시켜서, 그건 곧 뭡니까? 일불승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말하자면 최상의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라 라고 하는 그러한 내용이죠.

 

‘우리 부처님들도 또한 가장 미묘한 제일의 법을 얻었지만 여러 종류의 중생들을 위하여 나누고 쪼개어서 삼승법을 설하노라’

 

‘나누고 쪼개어서 삼승법을 설하노라’사실 부처님 깨달으신 그 경지는 그냥‘모든 사람이 부처야’『화엄경』입장에서는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건 이제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니까 나는 사람중심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야. 그렇지만 부처라고 했을 때 그걸 제대로 수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말이야. 죄 많은 인간이요 업장 많은 중생이요 그래서 고통에 윤회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그것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데

 

오늘 또 아침에 어떤 신도님이 그랬어요.“스님의 말씀은『법화경』에 의지해서 원론적인 이야기는 참 고준하고 높은 법인 것은 사실인데 개개인의 자질구레한 어떤 그 문제들, 현재 내가 앓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좀 해결하는 그런 방편의 이야기가 없어서 유감이다.”저도 그거 알아요. (하하) 근데 어떻게 할 길이 없어.『법화경』을 앞에 놓고는, 나중에『지장경』이야기를 할 때는 내가 딴 이야기를 할 지 몰라도『법화경』을 앞에 놓고는 양심상 내가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어. 그건 부처님이 용납을 안하실거 같애. 뭐 크게 무슨 뭐 방편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은, 그래 뭐 저의 처방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없어요.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면은 저도 편하고 부처님도 인정을 하고 또 방편이니까 여기『법화경』이니까“『법화경』놓고는 그렇게 하지 마라!”아마 그러실거야.

 

그래서 여기 보십시오.‘나누고 쪼개어서 삼승법을 설하노라’그런데 이 삼승법이 지금 이천 이제 제 뭐 부처님 당시라도 생각을 하더라도 25~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이 불교는요 이게 정말 역사와 더불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가르침이기 때문에 아주 그 적응을 잘하고 변화를 잘합니다. 변화도 잘하고 적응을 잘해요. 어떤 지역을 따라서 불교가 흘러올 땐 그 지역에 맞게 변화하고 또 시대가 달라지면은 사회가 달라지면은 그 시대와 그 사회에 맞게 불교가 또 적응을 합니다. 방편을 써요.

 

그래서 부처님은 방편을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기껏해야 아주 단순한 세 가지 방편을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지금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와가지고는 무수한 방편, 수십만 가지, 수백만 가지의 방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불교라는 이 존재가 살아있어서 시대에 적응을 잘합니다. 또 지역에 적응을 잘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방편이 저 중국에는 없을 수가 있어요. 중국에 있는 방편이 우리나라에는 없기도 합니다. 저 태국 불교국가죠? 태국에 있는 방편이 우리나라에 없는 경우가 많아. 그런데 우리나라에 또 있는 방편이 태국에 또 없어요.

 

아무튼 이 불교는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면요 살아서 뭐 우리 사람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살아서 활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이 불교 자체입니다. 그래서 지역과 사회와 환경에 따라서 잘~ 조화를 하면서 적응을 하고 그리고 거기에 맞게 그 중생을 제도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참 무수한 방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법화경』은 그 많고 많은 방편들 전부 융합해요. 통섭하고 융합합니다. 왜냐?『법화경』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 통찰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불교 경전의 가르침 중에서도 최고의 통찰력을 가진 안목이 바로『법화경』안목입니다. 그래서 그 많고 많은 방편 앞으로 또 예를 들어서 내년이나 아니면 10년뒤에 한국불교에서 어떤 방편이 생길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방편보다도 또 다른 방편이 또 생길거에요. 또 생겨야 됩니다. 왜냐? 시대가 달라지니까. 시대가 달라지니까 또 방편이 생겨야 되요.

 

그런데 그런 방편이 생기면 이『법화경』은 다 아우릅니다. 다 통섭합니다. 그래서 다 융통해요. 그러면서 궁극적 차원으로 고건 역사적인 차원이거든, 서두에 이제 역사적인 차원과 궁극의 차원 두 가지 방향을 이제 말씀을 드린 이유가 그거입니다. 흘러가면서 변하는 것은 역사적인 차원이에요. 그러면 역사적인 차원만 가지고 우리가 매달리고 말 것인가? 우리의 그 본질, 우리의 진정한 생명 그것은 놓쳐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차원입니다. 그게 참 생명이에요. 우리들의 진정한 주인공이고 나의 참 주인공이고 우리의 참 생명이라. 그 참 생명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생명 그대로입니다.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이 그대로 내 생명이다. 내 생명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이다. 이렇게 표현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차원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궁극적 차원 그 양면에 있다는 것 꼭 그 잊어서는 안되죠. 그게 꼭 그렇다고 나눠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서로 넘나듭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서로 넘나들듯이, 몸이 피곤하면은 마음도 피곤하고 마음도 젖죠. 그런데 마음도 기분 나쁘면 몸도 피곤해. 서로 넘나듭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독립할 수도 있어요.

 

그와 같이 우리 인간도 부처님도 그리고 모든 삼라만상도 역사적인 현상적 차원이 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진정한 생명체인 궁극적 차원이 있어요. 그것이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둘이면서 서로 넘나듭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후에, 20년 후에 불교에 어떤 방편이 또 생기더라도 방편은 방편대로 우리가 다 수용하면서 한편 궁극적 참 생명의 길은 놓쳐서는 안된다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화풍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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