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⑥>
부처님이 갖추고 계신 미증유한 법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우리가 부처님을 찬탄하고,
믿음을 가지고 정진을 하더라도 바른 가르침에 의해서 행하지 아니하면 의미가 없다.
바른 가르침 즉 정법이다.
정법은 진리인 일불승인, 오직 법화경에 한한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려면 엄청나게 공부해야 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우주를 만든 것이 진리의 힘이다.
따라서 행이 중요하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제목을 부르는 것은
부처님의 입장에서 묘법연화경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내가 소리를 내서 제목(묘법연화경)을 부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해서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부처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이 중생을 위하는 것이 된다.
법화경하는 것을 표시하려고 제목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목이 곧 나 자신도 구원하는 행이 된다.
우리들도
부처님 마음을 내면 많은 다른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듣고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게 듣고 바른 마음과 바른 행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
제목을 부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나와 있느냐?
문저에 뜻을 넣어 놓으셨다고 했다.
법화경을 최초로 구명하신 천태대사께서 이 제목을 “문저비침” 이라고 했다.
즉
비밀히 감추어 둔 것이라 했다.
경을 읽고 쓰고 하는 것은 이 제목의 힘을 더 해 주는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오종법사(五種法師)의 행을 하는 것이 된다.
본문에
“여래방편 지견바라밀 개이구족 사리불 여래지견 광대심원 무량무애
역 무소외 선정 해탈 삼매 심입무제 성취일체 미증유법”
이라.
여기서
무량무변 역 무소외 선정이란
자비희사의 사무량심과 사무애와
열 가지의 아는 힘과 사무소외와
선정 해탈 삼매에 끝없이 깊이 들어 일체 미증유의 법을 성취 하셨느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방편품은 42년 동안 설하신 것을 축소 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화경에 들면 방편 진실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무량한 것에는 4가지가 있다.
이것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한다.
사무량심이란
자심, 비심, 희심, 사심의 4가지 마음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 4가지 마음을 다 갖추고 계신다.
자심(慈心)이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남이 행복한 것을 보면
시기 질투를 하고 괜히 미워하고 싫어하고 그런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을 더욱더 행복하게 해 주고자 하는 분이 부처님이다.
우리 중생들이 이 마음을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심(非心)이란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마음, 이것이 비심이다.
법화경 배우기 전을 생각해 보자.
남이 고통 받으면
특히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고통 받으면 “안 됐네” 해놓고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안된 말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속설도 있다
마음을 그렇게 쓰면 안 된다.
“남의 고통이 곧 내 고통”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고통을 받지 않는다.
남 고통 받는 것을 고소하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그 몇 배의 고통이 나한테 온다.
이것이 인과다.
지은 것에 대한 ‘과’인 것이다.
반드시 고통이 오게 돼 있다.
희심(喜心)이란
남을 즐겁게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남의 행복을 같이 기뻐해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남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 잘됐다 축하한다 하고
박수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겉으로는 잘됐네 하면서 속으로는 샘이 나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사심(捨心)이란
남한테 베푼 일에 대해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고통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는 마음이 사심이다.
내가 미워했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여 버리는 것이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무조건 미워하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한 마음이다.
사심이 바로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남을 존중하고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없애 버리고,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4가지 (자심, 비심, 희심, 사심) 무량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사무애(四无涯)가 있다.
법무애, 의무애, 사무애, 요설무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무결하다.
허망함이 없으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티끌만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법무외(法無畏)라 한다.
의무애(義无涯)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완전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모두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다.
한꺼번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무애(辭无涯)란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에게 근기에 맞는 말씀을 해 주신다는 뜻이다.
궁극에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일불승을 설하시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은 다 구원하고자 하신다.
스님이 잘한다고 칭찬만 해 주면 불자들은 좋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칭찬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칭찬도 하시고 야단도 치신다.
올바른 스승은 잘못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쳐 줘야 한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은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즉
명예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 아 저 스님은 무조건 너무 좋은 말만 하시고 너무 좋더라”
고 한다.
듣기 싫은 말하면
상대가 기분 나쁘다는 것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때로 채찍을 드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잘못된 것을 하책하지 않으면 참된 성문이 아니고, 나의 진실한 제자가 아니다.”
라고 하셨다.
인정받고자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칭찬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가르쳐야 된다.
모든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 알맞게 법을 설하시는 힘을 갖고 계신다고 하는 것,
즉
말씀하시는 것이 자유자재 하신 것이 사무애이다.
요설무애(饒舌无涯)란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즉 다른 사람이 나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나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설법하는
것이다.
또한
아무리 나한테 박해를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설법하는 것이 요설무애다.
사무애 중에서 요설무외가 가장 중요하다.
부처님은 이것 자체도 갖추고 계신다.
제바달다가 부처님을 해 하려고 했지만 그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설해 주셨다.
지금 말법시대는 오탁악세다.
이 말법에는 바른 법을 설하면 비웃음을 받기도 한다.
스님은 10년을 겪어 왔다.
경주 현광사를 창건해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겪고 있고 당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는 돌과 몽둥이로 맞기도 했다.
박해를 수없이 많이 당했다.
이 법을 설하면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설사
내가 어떤 박해로 인해서 목숨을 빼앗기는 일이 있다 해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견을 가지고 설해서 중생을 혼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설사
나를 박해한 사람일지라도 금생에 이 법에 귀의하지 않으면 다음 생애라도
반드시 이 법에 귀의 하게 되어 있다.
열반경 제10권 일체대중 소문품에
순타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계율을 파계한다고 설하셨는데
어떤 것이 계율을 파계하는 것이냐고 질문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정법을 훼손하고 의심하고, 정법을 비방하고,
정법을 설하는 자를 비방하고 의심하는 것,
이것이 곧 계율을 파괴하는 것이니라.”
고 하셨다.
정법을 훼손하고 비방하는 자도 자기 스스로 진실로 마음을 바르게 고쳐
참회를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참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참회하는 것만큼 거룩한 것이 없다.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것은
백만 대군과 싸워 이긴 것보다 더 값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설사
법을 설하는 자를 비방하고 법을 의심했더라도 이 법에 다시 들어와서
참회를 하고 용서를 스스로 받아야 한다.
되돌아 와야 한다.
왜냐하면
이 정법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중생들에게 절대적인 진리요 하나 밖에 없는 가르침인
묘법연화경에 들어 와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 갖추고 계신 열 가지 힘인 십력(十力)이 있다.
(1)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과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
즉 모든 중생이 행하고 있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 바른 것인가
바르지 못한 것인가를 부처님께서는 정확하게 아시는 힘을 갖추고 계신다.
(2) 삼세업보를 아시는 지혜를 갖추셨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정확하게 아시는 힘을 갖추고 계신다.
(3) 모든 선과 해탈과 삼매를 아는 지혜의 힘을 갖추고 계신다.
(4) 모든 중생의 근기의 승렬을 아는 지혜의 힘이 있다.
중생의 근기가 각자 다 다르기 때문에 근기가 높고 낮다는 것을
낱낱이 다 아시는 지혜의 힘을 갖추고 계신다.
(5) 가지가지의 이해함을 아는 지혜의 힘을 갖추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듣고 이해하는 정도를 아신다.
중생에게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에 대해서 얼마만큼 이해했는지를 다 아신다.
(6) 각자 개인의 환경을 부처님은 다 아신다.
그래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믿음을 갖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실천해 나가면
부처님께서 내 환경을 아시기 때문에 감응을 하신다.
이것이 가지가지 계를 아는 힘을 갖추고 계신다는 뜻이다.
(7) 어떠한 일을 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는 것을 부처님은 다 아신다.
부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다.
그런데 화두 하나 깨달은 조사를 보고 그런 도리가 있었느냐고 반문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8) 부처님은 불안(佛眼)으로 보시지 중생의 눈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다.
불안으로 모든 것을 다 보신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눈이 아니고, 부처님의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못 보시는 것이 없다.
(9) 전생부터 정해진 일을 모두 아시는 지혜의 힘을 갖추고 계신다.
너는 어떻게 해서 중생으로 태어나고,
너의 미래세는 어떻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부처님은 다 아신다.
(10) 습기 끊음을 아시는 지혜의 힘을 갖추고 계신다.
습기라는 미혹을 끊었다 하더라도 다시 생길 수 있는 그 부분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조차도 아신다.
부처님은
밑바닥의 먼지 하나 묻어 있는 그것까지도 다 아신다.
행동상으로는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없으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악한 마음이
남아 있으면 언제라도 그 악한 마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티끌만한 악한 마음이라도 부처님은 다 아신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러한 습기마저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열 가지의 아는 힘을 갖추고 계신다.
진실한 해탈과 삼매를 증득해서 보살로서도 감히 알 수 없는 미증유한 법을
성취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⑧>
일념삼천
사리불아, 여래는 능히 가지가지로 분별하여 모든 법을 잘 설하시되,
언사가 부드러워 중생의 마음을 즐겁게 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중요한 것을 요약해서 진리를 말하건대
한량없고 가이없는 미묘한 최고의 진리를 부처님은 다 성취하셨느니라.
그만두자. 사리불아, 더 말하지 않겠노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부처님이 성취하신 진리는 가장 희유하여 알기 어려운 법이니라.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묘법의 참모습을 능히 연구하시어
다 아시느니라.
이른바 모든 법이 이와 같은 형상[相]이며,
이와 같은 성품[性이]며,
이와 같은 바탕[體이}며,
이와 같은 힘[力]이며,
이와 같은 작용[作]이며,
이와 같은 원인[因]이며,
이와 같은 연[緣]이며,
이와 같은 결과[果]며,
이와 같은 갚음[報]이며,
이와 같은 처음과 끝이 궁극에는 같음[本末究竟等]이라.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시되 말씀이 부드럽고,
부처님의 말씀은 중생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진리는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는 법이다.”
라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얻으신 이 법은 부처님만이 아는,
실로 미묘하고도 미묘한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에 설하게 되면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설하지 않겠노라, 그만두자 더 말하지 않겠노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실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진리는 가장 미묘하고 실로 희유해서 알기가 어렵고,
그래서 믿고 들어오기가 힘들다.
이 법이 얼마나 힘든 법이면 사리불존자가 세 번 청하고,
부처님께서 세 번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영산 회중에 모여 있는 대중들은 모두가 다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실상의 참 모습을 설하시게 된 것이다.
부처님이 이 법화경을 설하신 것은
일체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만이 법의 실상의 참 모습인 진리를 설하실 수 있는 것이다.
실상의 참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 소위제법(所謂諸法)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 여시보(如是報)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이것을
십여시(十如是)라 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법화경 서품에서 14품 안락행품까지 적문(迹門)이고,
그 이후 품은 본문(本門)이다.
적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방편품이고,
방편품의 핵심이 바로 이 십여시이다.
십여시는
우리가 가장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 중에서 또한 바르게 알아야
하는 부분이고,
이것이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신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해서
중생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부처님은 중생을 결코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아니 하신다.
오직 중생을 불쌍하고 가엽게 생각하시고
모두가 석가모니 당신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법을 설하신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다르다.
중생들의 마음은 작은 것 하나 알았다 하면
자기만이 아는 것이라고 남에게 뽐내고 싶기도 하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고도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중생들이 진리를 모른다는 것을 아주 가엽게 생각하신다.
어떻게든지 알도록 해 주신다.
중생을 가엽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알게 해 주시려고
중생근기에 따라서 그 팔만 사천 가지의 그야말로 갖가지 말씀을 해 오신 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하나하나가 전부가 다 바른 수행이다.
바르게 수행을 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중생들도 부처님과 같이 되어야 한다.
그런 뜻으로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법화경에 들어와서
삼승(성문 연각 보살)이 곧 일승이라[三乘卽一]고 하셨는데,
이것이 방편품에서 들어나는 것이다.
방편품 십여시에서 나타나는 뜻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를 해서 일부 인사들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은 모두 똑같다’
이렇게 말을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인 경전이 다 똑같을 것 같으면 왜 경의 이름을 지어서
법을 설하셨겠느냐?
이것이다.
기독교 성경처럼 부처가 되셔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경 하나로 하시지
왜 수많은 경의 이름을 붙여서 설하셨는가.
일일이 경의 이름을 다르게 했다는 것은 경마다 그 품격이 다르고,
뜻이 다르며,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높고 낮음이 분명히 있다.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은 중생을 위해서 방편을 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가장 높고 낮음이 다 들어있는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셋으로 나누어(삼승)
성문의 수행, 연각의 수행, 보살의 수행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경은 다 똑같다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법화경 자체를 학문적으로만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학문적인 시각으로만 보게 되면
다른 경도 다 “이 경이 최고”라는 말씀이 있어서 똑 같다는 견해가 나올 수 있다.
법화경이
부처님 경 중에서 제일임이 바로 “제법실상 십여시” 이 가르침으로 인해서
다른 경과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모든 법이 이와 같은 형상이며,
이와 같은 성품이며,
이와 같은 바탕이며,
이와 같은 힘이며,
이와 같은 작용이며,
이와 같은 원인이며,
이와 같은 연이며,
이와 같은 결과며,
이와 같은 갚음이며,
이와 같은 처음과 끝이 같음이라.
제법실상의 본체와 현상이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 궁극에는 평등하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한 가르침과 방편의 가르침이 있다.
법화경은 진실이요, 42년간 설하신 것은 방편이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진실한 상은 십여시라고 한다.
소위제법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 10가지이다.
이것을 십여시라고 한다.
'여시(如是)’는 ‘이와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조건’ 이것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여시에
‘여’는 ‘항상 같다. 언제나 같다.’
모든 사물은 십여시의 열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 궁극에는 ‘평등해 진다’는 것으로
절대적인 진실한 경지(경계)이다.
진실한 경지인 여시상에서 여시보까지를 깨닫게 되면 평등한 진실의 지혜에 들게 된다.
그래서
원융한 실상을 이루게 하는 것은 여시본말구경등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져서 평등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와 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법은 법계에 두루 갖춰져 있다.
법계는 바로 이 우주를 말한다.
제법실상이라 했다.
법계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실상은 십여시에 서로 갖춰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마음속에 삼천 가지의 마음이 갖춰져 있어 제법실상이라고
천태지의 대사께서 밝히신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
삼천의 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삼천 가지의 세계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마음은 변한다.
왜냐,
십여시의 세계와 십계가 있기 때문이다.
십계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과 사승(성문 연각 보살 부처)을 더하여
이 열 가지 세계를 십법계라고 한다.
십여시 한 개 한 개마다 십여시가 다 들어있다.
(10☓10〓100).
100여시 각각에 또 십계가 적용되니 1000계가 된다.
또, 한 법계 속에 삼종세간(국토세간 중생세간 오음세간)이 갖춰져 있다.
이렇게 전부 갖춰져 있는 것을 보니 삼천(3000)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이 삼천 가지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 삼천 가지 세계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념삼천이라 하는 것이다.
제법 실상의 진실한 모습이 십여시라고 했다.
실상은 십법계의 실상을 말하는 것이다.
줄여서 십계라고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불심 속에서 십여시를 관할 때 십여시가 다 무상(無相)의 상이다.
즉 말하자면
'상이 없는 상이다’라는 뜻이다.
상이 없는 상이 되기 위해서는 금강경에서 4가지 상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무상으로서의 ‘여시보(如是報)’하면
오직 부처님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 스스로 수행을 해서 얻어진
진실과 방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자신의 수행에도 방편을 사용하셨다.
수행을 한다는 자체가 사실은 방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실을 나타낸다.
또 진실을 나타내는 것도 부처님은 자유자재 하시다.
진실을 나타내시는 것도 뜻대로 하실 수 있고,
닫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방편을 쓰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방편을 쓰면 안 된다.
제법실상 말씀을 보면 방편은 아무나 쓰면 안 된다.
중생이 방편을 쓴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예를 들어
점쟁이가 방편하는 것,
철학하는 사람이 방편하는 것.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방편을 쓰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중에 이 법으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수단으로써 방편을 쓸 수 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 법을 듣게 하기 위한다는 그 마음 자체가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사람은 보살의 행을 하는 것이 된다.
오직 정법인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 인도하기 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도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제법의 십여시는 일여시에 십법계가 갖춰져 있음과 같이 각각 법계마다 십법계가 갖춰진다.
즉, 일법계인 지옥의 세계 속에 십법계가 다 갖춰져 있다.
그래서
지옥에서의 성불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에 들어오면 악인의 성불도 되고,
축생의 성불도 되고 하는 것이다.
축생계에도 십여시와 십법계가 갖춰져 있다.
그러니까
여시상에서 여시본말구경등에서 전부 평등해지니까
축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이 삼천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십여시와 십계호구라 해서 일체 모든 법이 이 우주 법계에 서로 갖춰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간은 중생들의 생명이 구체적인 존재로 활동하는 곳,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구체적인 존재가 활동하고 있는 곳인 세간은 우리가 활동하는 장소란 뜻이다.
불계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계까지
즉, 십법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다 갖춰져 있지만
우리 몸 밖에도 지옥의 세계가 있고,
축생의 세계,
아귀의 세계,
수라의 세계,
하늘의 세계,
사람의 세계,
성문의 세계,
연각의 세계,
보살의 세계,
부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은 없고, 오직 내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일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여시에서 나온 말이다.
하나의 마음에 삼천 가지 세계가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지옥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도 있지만 우리 외부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차별이다.
외부에도 지옥의 세계가 있고, 부처의 세계가 있다.
다 그 세계가 차별을 가지고 이루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축생의 세계라 해도 우리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축생이 된다.
사람이 성을 내면 수라이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으면 아귀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 이게 지옥세계이다.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살아간다.
하늘은 모든 것이 풍족히다.
풍족에 만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안 좋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세계,
연각의 세계,
성문의 세계,
보살의 세계,
부처의 세계가 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도 있지만 우리 외부의 세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음에 말하자면
백계가 갖추어지는데 십계호구로 치면
국토세간의 십계호구.
중생세간의 십계호구.
오음세간의 십계호구.
이렇게 해서 보니 일계에서 백계가 되는데 백계에서 십계호구에 있으니 삼백호구가 된다.
삼백은
또 하나의 계마다 십여시가 갖추어져 있으니 삼천계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한 찰나에 삼천 가지 성질이 작용하기 때문에
‘일념삼천’이라 하는 것이다.
단번에 깨달아 버린다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런 법을 제대로 알면
아무리 도인 흉내 내는 사람이 있어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⑨>
일체 중생의 성불
십여시(十如是)를
또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십법계(十法界)라고 한다.
십법계도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 · 천 ·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다시 말하면
지옥계(地獄界)부터 불계(佛界)까지 내 마음 속에 있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내가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
괴로운 그 순간이 지옥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에도 분명히 열 가지 세계가 들어 앉아 있다.
그래서 십여시가 있는 것이다.
바깥에도 십법계가 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으면
내가 그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간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매사 자기 자신 욕망만을 위해 사는 것은 결코 바른 마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잘못된 것은 남의 잘못으로 돌리는데 알고 보면 내 탓인 것이다.
때로 좋은 일을 하고도 비난을 받는 일이 있는데
그것도 엄밀히 따져보면 내 잘못인 것이다.
내가 좋은 일을 한다는 상(相)을 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이기 때문에 좋은 일하고 욕을 먹으면 싫다.
그러나
좋은 일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는
열 가지 마음, 지옥계에서 부처님세계가 이미 다 들어 있다.
부처님의 마음을 보더라도 중생이 갖추고 있는 마음(십계)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팔만사천법문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도 부처님의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나쁜 마음을 갖게 되면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성악설이다.
반대로
중생이라 할지라도,
혹은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법화경의 뜻이다.
법화경을 그래서 최고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선설이다.
하늘에 떠있는 달은 하나지만 물속에 비친 달은 많다.
이 달의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부처님께서 42년간 설하신 법은 실상이라는 인(因)을 짓는 것이 없다.
말하자면
이것은 여시인(如是因)이 아니고 도장이다.
42년의 가르침(방편)에는 진실한 부처님이 없다는 뜻이다.
가불(假佛),
임시로 만들어놓은 부처란 말이다.
꿈속에서 부처를 보는 것과 같다.
몽중불이라고 한다.
42년 동안의 가르침은 몽중불이라고 한다.
십법계라는 것도 열 가지 세계가 있지만,
십여시를 나타낸 것은 곧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열 가지 세계가 있지마는
하나를 나타내기 위해 십여시를 설해 놓으신 것이다.
십법계 중에 불법계
즉 부처님의 세계를 제외한 아홉 가지 세계는 몽중의 십여시와 같다.
꿈속의 부처와 같다.
왜냐 하면
십법계 중에 불법계의 십여시는 본래부터 깨달음인 생시의 십여시가 되기 때문이다.
즉
허공에 떠있는 달은 하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것이다
불법계는 허공에 떠있는 달이고, 나머지 아홉 세계는 그림자이다.
십여시 중에서도 부처님의 세계의 십여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구법계는 물속에 떠있는 달과 마찬가지다.
몽중 십여시다.
결국은
십여시라는 것은 처음과 끝이 차별이 없다.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본말(本末)에서 본(本)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십여시이고,
말(末)자는 일체제불의 십여시가 된다.
그런데
일체제불은 중생의 한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여기서
여시상 여시성 여시체,
이것이 부처로 삼신이라 한다.
여기서
중생과 부처가 함께 나온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중생이 없으면 구원할 일이 없다.
그래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없다는 뜻이다.
이 뜻의 증문이 있다.
묘법연화경 비유품에
“이 삼계는 내가 둔 바이니 모든 중생은 다 나의 자식이니라”
부처님의 지혜는 아버지에 비유고,
어리석은 중생은 자식에 비유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주공간보다 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에 삼천 가지의 세계, 삼세간이 있다.
세간이라 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국토세간(國土世間),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을 삼세간이라고 한다.
국토세간은 십계의 중생이 살고 있는 곳이다.
십계중생이 살고 있는 환경, 이것을 일컫는다.
국토세간이라는 곳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대상으로 해서 가르침을 펴는 곳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원래의 국토를 밝히지 않으시다가 법화경 종지용출품에 이르러서 비로소
본래의 국토를 밝히신다.
“나는 사바세계에 항상 상주한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부처님은 항상 우리 옆에 계신다.’
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 즉 사바세계에 있는 중생을 대상으로 해서 가르침을 펴고
계시는 것이다.
사십 이년 동안 설하신 방편에서는
부처님의 본래 국토를 밝히지 않으셨다.
법화경에 들어와서도 14품에서까지는 밝히지 않으셨다.
십오품에서 서서히 밝히시기 시작하면서
여래수량품 십육에서 완전히 밝히신 것이다.
사바세계가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토가 되는 것이다.
고향이 되는 것이다.
본적이 되는 것이다.
성을 따지면 경주김씨 무슨 김씨 많이 있다.
바로
그것처럼 부처님이 많은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국토는 사바세계다.
중생을 대상으로 해서 교화하시기 때문에 항상 사바세계에 상주하신다.
그것이 여래수량품에
“항상 나는 사바세계에 상주하면서 설법으로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였느니라.”
이런 말씀이 있다.
중생세간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세계까지 일계 일계가 차별을 이루는 주체인 생명이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세계까지 십계다.
이 십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있는 곳이 바로 중생세간이다.
모든 중생들이 생명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대상인 것이다.
또한 지옥계에서 불계까지 모든 중생이 차별을 이루는 주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본래 부처, 본불(本佛)이 된다는 것이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곧 중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나온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가 본래 부처임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화경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오음세간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 활동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색음(色陰), 수음(受陰), 상음(想陰), 행음(行陰), 식음(識陰), 이 다섯 세간이다.
색음은
유형의 물질인데 신체의 물질적 측면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색이라는 것은 몸을 말한다.
그래서 이 몸을 색음이라고 한다.
수음은
육근(六根)이라 해서 안 이 비 설 신 의(眼耳鼻舌身意),
즉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이라는 여섯 가지를 통해서
외계에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상음은
수음으로 인해서 외부에 있는 것을 받아들여서 인식해, 마음으로 생각하는 작용을 말한다.
행음은
육근으로 인해서 외부에 있는 것을 받아 들여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행동하는
의지 작용을 말한다.
이 행음이 중요하다.
즉 말하자면
외부에 있는 것은 좋은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중생은 나쁜 것을 먼저 받아들인다.
나쁜 것을 먼저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쁜 행이 먼저 나온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행동하기도 어렵다.
행이라는 것을 잘해야 한다.
행이라는 것은
마음·몸·뜻에 의해서 바르게 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바르게 하지 못한다.
바른 행이란
내 위주, 내 중심적으로 생각해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입장에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중생은
오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은 도외시하기 쉽다.
여기서
온갖 문제가 생겨나고 갈등이 심화된다.
선한 작용이 나와서 행동에 옮기는 게 아주 중요하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마음이 아닌 부처님의 자비심이 바깥으로 나와야한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바르게 배워서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행음이다.
식음은
수음·상음·행음, 이 세 가지의 작용을 일으키는 근본이 식음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본체가 식음이라는 뜻이다.
수상행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근본이 식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 오음세간이다.
이 오음세간을 두 가지 법으로 분별할 수가 있다.
색음이라는 것은
몸이라는 뜻이고, 색법(色法)에 해당한다.
나머지 네 가지 수음·상음·행음·식음은 심법(心法), 즉 마음법에 속한다.
색법과 심법,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오음도 두 가지로 나눈다.
색은 몸,
나머지는 마음인데 육체와 정신 두 면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이 양면을 가지고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 활동하는 것은 다섯 가지 요소로 하는 오음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몸과 마음의 참된 작용을 모르고,
껍데기로 그냥 살아있으니 몸과 마음이라는 식으로 사니까
깨끗한 것인지 더러운 것인지 분별을 못한다.
이러한 공부를 제대로 하게 되면
결국 자기 것이 돼서 불계에 이르는 즉신성불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그렇지 못하면 눈 깜빡할 사이에 지옥에 떨어져 있고,
눈 깜빡할 사이에 축생의 개나 돼지나 다름없이 된다.
눈 깜빡할 사이에 보살도 되고, 눈 깜빡할 사이에 수행자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일념삼천으로 하나의 마음속에 삼천 가지 세계가 있다.
이것으로 인해 비록 지옥계에 있을지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선설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또 불계에 있을지라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성악설이 성립이 된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성불이 가능하고,
축생의 성불도 가능하고,
여인의 성불도 가능하고,
악한자의 성불도 가능하고,
일체 중생의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느냐?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부처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가만히 있는데 돈이 생깁니까?
안 생긴다.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노력을 해야 돈이 생긴다.
그와 같다.
내가 부처되려는 큰 원을 세워서 행으로 실천하면 성불하게 되어 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 들어오면 즉신성불(卽身成佛)한다고 분명히 말씀해 놓으셨다.
<묘법연화경 방편품제이⑩>
성품을 바꾸려면
몸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남에게도 전해 주고,
구원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그런 사람이 됐을 때 그 사람은 보살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이라는 사람은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야 하고,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열반경에서
법화경을 대수위이고 추수동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열반경 제9권 여래성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놓으셨다.
“중생들로 하여금 능히 불성을 봄과 같은 것은
마치 법화중에서 팔천의 성문이 수기를 받아 큰 과실을 성취함과 같다.
또한
가을에 거두어서 겨울에 창고에 가득히 간직하면 다시 지을 것이 없듯이
일천제(믿음이 없는 사람)의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모든 선한법에 대하여
다시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음이라.”
이 법화경에 들어오면 다시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의 열반경 경문에 있듯이 법화경을 대수위라 했다.
추수동장이란
‘가을에 수확을 해서 창고에 가득히 간직함과 같다’
하셨고,
열반경에 대해서는 추말동초라 이삭을 줍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 자체를 낮추신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만큼
법화경은 일체 중생이 수지해야 할 가장 높고 큰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법화경 제목을 나타내신 것이다.
제목을 부르는 것은 대수위로써 불도에 들기 위한 뿌리가 되는 것이다.
불도란
부처님의 도에 드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에 드는 것이다.
불지에 들고자 하면 반드시 뿌리가 있어야 한다.
뿌리가 없이 부처님의 도에 들 수가 없다.
아함경이나 금강경이 뿌리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또,
열반경 제사권에 이 시대를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 있다.
“선남자야 내가 열반한 뒤 무량백년이 지나 네 종류의 성스러운 도인이
다시 열반하여 정법이 소멸한 뒤 상법시대의 비구들은 계율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을 독송하는 자가 적다.”
네 종류의 성스러운 도인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지칭한 것이다.
진실한 성문, 진실한 연각, 진실한 보살, 부처님 이렇게 네 종류의 성인인데,
정법이 소멸한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지 않고,
자기 사견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지금으로 봐서 과연 그러하다.
달마대사가
능가경을 가지고 2조 혜가에게 전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육조에 들어서 화두선을
만들어가지고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보다 더 수승하다고 사견을 설하고 있는 자가
많지 않은가.
정법시대의 비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상법시대의 비구들은 계율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을 독송하는 일이 없고,
사견에 집착해 있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하셨나 하면
말법에 비구는“기호품인 음식에 탐착하여 그 몸만을 장량하리라.
오직 자기 몸을 보신하리라”
하셨다.
“그러면서도 몸에 입은 옷은 남루하고 추악하여 그 행색은 초췌하고
위의와 공덕이 없어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옷을 반들반들 하게 잘 입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남이 볼 때는 옷을 남루하게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이 보았을 때는
옷도 남루하게 입고,
못 먹어서 피접이 상접해있고,
삐적 말라서 얼굴이 형편없이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위의와 공덕이 없다는 것은
얼굴이 불쌍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마음과 겉이 다르다는 뜻이다.
마음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수행자들도 이중성격을 가진 자들이 많은데,
수행자가 아니라도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진실해야 한다.
이중성격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므로 이중성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지난 과거에 얽매여 살게 마련이다.
지난날에 좋았던 일이나 좋지 않았던 일에만 집착하고 현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진 지난날의 금송아지 생각 때문에 현재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지금
고난에 처해져 있는데도 잘 살았던 때만을 생각 하고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책만 하고 있으니까 살아가려고 하는 의욕마져 잃고 마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가 왜 중요한가 하면 미래는 현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래가 있고,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인도에서 바라문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부처님도 바라문교의 스승들을 6년간에 걸쳐 만났다.
그러나
부처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6년 동안 헤매시다가 이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고,
독립하여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신 끝에 불지를 이루신 것이다.
바라문교에서 행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행하는 것과 다르다.
불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스님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대체로 전생에 지은 업으로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말은 바라문교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윤회라 하는 것 자체는 바라문교에서 인정을 한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지은 업이니 받아야 된다고 바라문교에서 말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주팔자대로 살라는 것이 바라문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사주팔자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설사 전생에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지은 복이 없었다 할지라도
금생에는 어리석지 않아야한다.
가난하면 돈을 벌도록 노력을 하고,
마음이 약하면 용기가 생겨나도록 하고,
마음이 나쁘면 좋은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을 하고,
반드시 노력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대과보를 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른 법을 믿고, 실천하게 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
이것이 불교와 바라문교의 다른 점이다.
바라문교에서
윤회설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부처님도 인정을 하셨다.
그러나 윤회 자체만 인정을 해서는 안 된다.
윤회가 있으면 그 윤회를 벗어나는 가르침이 불교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2년 동안 설하신 가르침은 절반의 가르침(방편)이 되는 것이다.
절반의 가르침인 전생의 업보에 집착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바른 법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설사
사주팔자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설하신 것이다.
사주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현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바른 양심,
바른 마음을 가지고 현재에 최선을 다 할 때 미래에 좋은 보장을 받는 것이다.
전생에 지어진 업보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버려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중생은 그게 안 된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인데, 이 불성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육도다.
육도의 마음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이 여섯 가지 마음이 불성을 감싸고 있다.
이것을 미혹이라고 한다.
이 미혹이 부처의 마음을 감싸고 있으니까 이것을 걷어내야 하는데,
걷어내려 하지 않고 그냥 끌려 다니는 것이다.
육도에 끌려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업보도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벗어나려고 하면 경전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으로써만이 가능한데
그것을 모르니 안타깝다.
미혹한 마음을 걷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꾸 살을 찌우니 세상이 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법을 다섯 가지 탁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부처님의 마음 또한 실로 미묘하지만 참 묘한 게 중생의 마음이다.
금방 변해서 희노애락에 집착하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화경 공부를 바르게 하면서 법문을 듣고 실천하면
이런 중생의 성품도 바꿀 수 있다.
성품을 바꾸려면 남을 탓하지 말고, 내가 그렇다 하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성품을 고칠 수 없다.
그래야만이 불성을 감싸는 육도의 마음이 점차 벗겨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육도의 더러운 미혹한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진다 해도 부처님의 법만이 오직 닦아낼 수 있다.
우리들은 아무리 좋은 선행을 해도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
보살행은 할 수 있다 해도 부처는 되지 못한다.
보살행이란
육바라밀, 보시 지게 인욕 선정 정진 지혜 이 여섯 가지를 갖추고자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는 이룰 수가 없고,
아무리 사회에서 선행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이는 성불할 수가 없다.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
실행함으로 해서 육도의 마음을 점점 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내가 하나씩 얻어가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면
광명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피가 있고, 어떤 사람은 늦게 온다.
그것은 업이 두텁고, 얇은 차이다.
딴 사람은 조금 노력해도 좋아지는데, 나는 몇 년 됐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이 생각 자체가 두껍게 만든다.
무조건 이 법은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묘하게 업장이 벗겨진다.
다른 사람은 잘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나 하면 질투하는 것이 되어 자꾸 두껍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미래를 밝게 할 수도 있고, 어둡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바르게 행해 나가면 반드시 미래는 밝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첫째도 믿음과 실천이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믿음과 실천임을 믿고 행할 때 광명이 오지 말라 해도 반드시 온다.
부처님의 말씀은 한 치의 허망함도 없다 하는 것을 믿고 따르면
반드시 미래는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무시할 권한이 없다.
남을 무시하면 내 자신도 언젠가는 무시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남의 의사를 존중하고, 남을 비아냥거리지 말고,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생각하고,
남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생각하고,
내가 베푼 것을 나타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면
내 안의 불성이 드러나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 편안한 삶을 살게된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방편품 제이(5-2)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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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5-3)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