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서품 제일①>
묘법연화경 서품의 7가지 공덕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묘법연화경(법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말법 중생들을 위해 설하신 경이다.
따라서
이 경은 어떤 경보다도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이고,
우리 중생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양약(良藥)이다.
이런 것을 나타내는 설화가 있어 법화경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소개할까 한다.
옛날 중국 수나라 당시에 하북성 무성이라는 곳에 법랑스님이 계셨다.
천태대사 당시의 사람인데 스님은 강소성이라는 곳에 있는 정도사라는
사찰에서 출가를 하게 된다.
천태대사는 597년에 입적을 하시고,
법랑스님은 593년에 입적을 하신 분이다.
이 법랑 스님은 53세까지 법화경을 아주 지극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53세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스님이 입적한 지 7일 만에 염라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다른 스님들도 많이 와 있었다.
염라대왕이 거기에 모인 스님과 다른 이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묻는다.
제일 첫 번째 한 스님에게
그대는 사바세계에서 어떠한 선업을 짓고 덕업을 쌓았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 스님은 자신 있게 저는 유마경을 평소에 읽었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남쪽에 가 있어라.
다음
그대는 어떠한 선업과 덕행을 쌓았는고?
저는 열반경을 읽었습니다.
그대도 남쪽에 서라.
그 다음
너는 어떤 선업과 덕을 쌓았는고?
저는 금강명경을 읽었습니다.
그대도 남쪽에 서라.
금강경과 유마경은 방등십이부경에 속하는 경이고,
열반경은 법화경을 설하시고 나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기 전
하룻밤 하루 낮을 설하신 가르침이다.
또 다른 스님께도
너는 어떤 선업과 덕을 쌓았는고?
저는 열반경을 강설하였습니다.
그대는 서쪽에 서라.
그대는 어떤 선업과 덕행을 쌓았는고?
저는 십지론을 강설했습니다.
염라대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대는 북쪽에 서라.
십지론은 논사가 쓴 글이다.
마지막으로
법랑 스님 차례가 되었다.
그대는 어떤 선업과 덕행을 쌓았는고?
저는 법화경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대는 동쪽에 서시오.
그래서,
모두 염라대왕의 분부대로 선업과 덕행에 따라서 동서남북에 갈려 서 있었다.
염라대왕의 호령이 떨어졌다.
북쪽에 선자는
지옥으로 끌고 가라.
십지론을 강설했다는 사람이다.
옛날 논사 조사들이 쓴 것을 논(論)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십지론을 강설했다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고 부처님의 뜻에 따라 강설한 것이 아니라
사견을 설했기 때문에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이다.
열반경을 강설한 자는
서쪽에 서라 했는데,
저자는 축생으로 태어나게 하라.
열반경이라 하면
법화경 다음인데 왜 축생으로 태어나야 하느냐?
법화경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열반경이 최고라고 강설했기 때문에 축생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은
가을에 곡식을 수확해서 창고에 가득히 채우는 것과 같은 경으로
추수동장이라고 지칭하셨다.
묘법연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밝히신 것과 같이 법화경은 보배창고로 없는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열반경은
추말동초라 하셨는데, 그것은 가을에 논에서 벼를 수확하고 난 다음에
이삭을 줍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법화경을 보완하신 말씀의 경이기 때문이다.
남쪽에 선자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라.
유마경, 금경명경, 열반경을 읽은 사람이다.
강설한 사람이 아니고 읽은 사람이다.
읽은 자와 강설한 자가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읽은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별없이 오로지 읽기만 했기에 방법(謗法)의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존재를 모르고 무조건 열반경을 읽었고,
유마경, 금강명경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무슨 경이든 읽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날 자격이 있다 한 것이다.
끝으로
동쪽에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법화경을 독경한 법랑스님이다 .
“그대는 다음에 천상계에 태어나되 지금 나이가 53세이니
다시 수명을 30년을 더 줄 테니, 더 살고 나서 그대는 내 앞에 올 필요도 없이
관세음보살이 영접을 해서 천상계로 바로 갈 것이다.
부처님 옆으로 바로 갈 것이다.”
염라대왕이 법랑스님에게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법랑스님은 일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
다시 살아난 스님은 염라대왕에게 갔던 이야기를 하고,
이후 30년 동안 지극하게 법화경을 수행하고 83세에 입적을 하셨다.
위의 설화는 단순히 이야기로 넘길 것이 아니다.
이처럼 법화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서 제호 최상제일의 가르침이다.
묘법연화경 서품은
경을 시작하는 품으로 일곱 가지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
첫 번째
서문성취공덕이 묘법연화경은 최고의 가르침으로
이 경은 실로 자재롭고 미묘한 특성을 갖춘 공덕이 있다.
어느 경이든지 경의 첫 문구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노라[여시아문(如是我聞)].’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이 묘법연화경에서 갖추고 있는 ‘여시아문’은
다른 여타의 경과 문자는 같지만 그 뜻은 다르다.
법화경은 여시아문 이후부터 바로 무조건 경문의 공덕이 성취된다.
이 경은 읽기만 해도 공덕이 많다.
이 공덕을 서문성취라 한다.
두 번째
중성취공덕 일체제불이 공양하고, 공경하고, 찬탄하고, 예우하고 하는
자세가 법답게 갖추어져 있는 그런 공덕이 성취된다.
이 법화경을 바르게 공부하면
예의가 갖추어지고, 부처님을 공양할 줄 알게 되고, 공경하게 되고, 찬탄하게 된다.
그래서
예의가 아주 바르게 되고, 내가 행하는 자세가 법답게 이루어진다.
하는 것이다.
중성취는 세 가지 공덕으로 나누어진다.
①수를 성취한 공덕.
법화경을 듣기 위해서 모든 중생들이 모여 있는 것.
법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중에 열여섯 부류의 대중이 모인 덕을 말하는 것이다.
②행을 성취한 공덕.
소승과 대승행을 닦는 수행이 아주 고르게 갖추어지는 공덕을 성취했다는 뜻이다.
즉
이 법을 듣고자 회중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바른 수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③섭이 성취한 공덕.
성문과 보살의 특성이 각각 다르다.
그러나 성문과 보살의 특성이 다르지만 그것이 다 갖추어진 것을 뜻한다.
세 번째
여래욕설법시지성취공덕
법화경을 설하실 때 묘법연화경의 공덕을 나타내는 17가지 이름을 사용해서
법을 드러내시었다.
법화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밝혀 얻게 하는 공덕이 성취된다는
의미이다.
무량의경, 최수승다라니, 대방관경, 교보살법, 불소호념,
일체제불비밀법, 일체불장, 일체제법비밀취, 능생일체제불경,
일체제불지도량, 일체제불소전법륜, 일체제불견고사리,
일체제불대교방편, 설일승교, 제일의주, 묘법연화경, 최상법문,
이렇게 17가지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셨다.
네 번째
의소설법계의수순주성취공덕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32상과 80종호를 갖추는 성취공덕 4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①부처님께서 무량의처 삼매에 드셔서 움직이지 않으신 것.
②여러 가지 꽃이 하늘에서 내림으로 해서 세간의 돌아가는 상황이
달라지는 것.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니 모든 이들이 무슨 상서러운 일인가 하고 상황이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게 되는 공덕이다.
③부처님을 우러러보며 대중들이 환희한 것.
부처님께서 무량의처 삼매에 드셔서 부처님의 상서를 내시고,
부처님의 상서를 우러러보는 대중들이 환희하는 일로써 중생세간이
움직여서 모든 중생들이 이 법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공덕이다.
④중생세간,
즉 중생이 살고 있는 세상인데 이 중생세간의 모든 경문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뜻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의지설인성취공덕
부처님께서 백호광명의 상서로 모여 있는 대중이 법을 듣고자 하는 생각을 하는 공덕이
성취된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상서내심은 실로 큰일이다. 우리는 이 법을 들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다 갖게 하는 공덕이 성취가 되었다 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대중욕문법현전성취공덕
부처님께서 백호광명으로 인해서 상서를 내셨는데 그 상서에 의심을 품은 모든 회중의
대중을 대표해서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에게 질문하는 일을 성취한 공덕이다.
미륵보살이 문수보살에게
“부처님의 상서를 백호광명으로써 신통을 내시고
차토육서(此土六瑞) 타방육서(他邦六瑞)를 보이시니까 도대체 어떠한 상서인가”
하고 대중을 대표해서 질문을 한다.
이러한 공덕이 이루어졌다 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
문수사리보살성취공덕
미륵보살의 질문을 받고 문수보살이 대답하는 공덕이 성취되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의문을 갖고 질문한 부분에 대해서 문수보살이 과거의 일들을 들어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것이라고 답변을 한다.
서품을 듣고 읽으면 이러한 7가지 공덕이 곧 읽는 자에게 온다 하는 것이다.
또한
묘법연화경 서품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까지의 영취산에 모인 수많은 사람과
거기 모여 설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기 위해서 준비하신 모습과 그 당시의,
즉 법화경 설법하시기 전후의 여러 가지 상황과 정황들이 설명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한 말씀도 없다
<묘법연화경 서품 제일②>
여시아문如是我聞-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一時) 불주(佛住)-왕사성 기사굴산 중(中)
여대비구중(與大比丘衆) 만이천인(萬二千人) 구개시아라한(俱皆是阿羅漢)
제루이진(諸漏已盡) 무부번뇌(無復煩惱) 체득기리(逮得己利) 진제유결(盡諸有結)
심득자재(心得自在) 기명왈(其名曰)
-아야교진여 마하가섭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 사리불 대-목건련
마하가전연 아누루다 겁빈나 교범바제 이바다 필능가바차 박구라 마하구치라 난타
손다라난타 부루나-미다라니자(子) 수보리 아난 라후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 때 부처님께서 마갈타국 왕사성 기사굴산 영산회상에서
큰 비구 대중 일만 이천 인과 함께 계셨으니, 이는 다 아라한이라,
이미 모든 누가 다하여 다시 번뇌가 없으며 깊은 진리를 얻어
모든 미혹된 습성을 없이하고 마음의 자재를 얻었음이라.
그 아라한들의 이름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가장 먼저 깨달은 아야교진여,
모든 탐욕과 집착을 모두 떨쳐버린 두타 제일의 마하가섭,
승단을 공양함에 제일가는 우루빈나가섭과
마음의 모든 번뇌를 조복 받은 가야가섭과
교화에 뛰어난 나제가섭과
지혜 제일의 사리불과
신통제일의 대목건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논의 제일인 마하가전연과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천안 제일의 아누루다와
천문과 역술에 뛰어난 겁빈나와
계율 해석 제일의 교범바제와
마음이 움직이거나 다른 생각을 일체 하지 않는 이바다와
경행과 좌선을 잘하는 필릉가바차와
병 없고 욕심 없는 박구라와
아무리 어려운 질문을 해도 답변 잘하는 마하구치라와
항상 기쁨으로 설법을 잘 듣는 난타와
용모가 부처님과 같이 빼어난 손다라난타와
설법 제일의 부루나의 아들 미다라니와
모든 현상이 공에 의한 것임을 잘 아는 해공 제일의 수보리와
부처님의 곁을 잠시도 뜨지 않고 시중을 든 다문 제일의 아난과
부처님의 아들로서 자기 자신의 덕이 높은 것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항상 겸손하였던 밀행 제일의 라후라 등이라.
제일 처음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되어 있다.
모든 불경은
‘여시아문’-“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라고 시작이 된다.
‘여시’의 뜻은
아주 겸손한 말이 들어 있다.
겸손할 뿐 아니라 분명하게 들었다.
또 내가 분명하게 들었기 때문에 확실하다.
조금도 틀림이 없다 하는 뜻이다.
왜 ‘여시’가 되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었기 때문에 만약 잘못된 점이 있으면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라, 내 책임이다.
이런 뜻이다.
이것은
전해준 사람의 잘못이지,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아함경, 방등십이부경, 반야경, 화염경 등 모든 경은 여시아문으로 시작이 된다.
무량의경 설법품에서
‘문사수일이의각이(文辭雖一而義各異)’라 하셨는데
이 뜻은
‘말은 같을지라도 그 뜻이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이다.
경마다 여시아문이라는 말은 같지만 뜻이 다르다.
라는 뜻이다.
경의 높낮이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경전마다 갖고 있는 뜻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여시’는 그 경의 총칭이다.
그래서
경이 다르면 여시의 뜻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묘법연화경의 ‘여시’ 하면
이 ‘여시’가 묘법연화경의 총칭이 된다.
아함경의 여시라 하면
아함경이 갖추고 있는 여시이고,
묘법연화경의 여시라 하면
묘법연화경이 갖추고 있는 여시가 되기 때문에 뜻도 다르다 는 것이다.
천태대사께서 법화문구에서
‘제경부동 여시역(諸經不同 如是亦)’이라
는 말씀을 하셨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 경이 같지 않기 때문에 여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경의 뜻이 다르기 때문에 여시라는 말 자체도 서로 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무량의경에서
‘문사수일 이의각이’라 하신 말씀과 같다 .
법화경은
경중의 왕이라 하셨기 때문에 여시도 또한 최고로 수승하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누가 이렇게 전했는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 아난존자라는 분(부처님의 종제,
육촌동생)이다.
아난 종제가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시자(스님을 시봉하는 사람)가 된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말씀을 아난존자는 다 외워 기억하는 신통력이 있었는데,
그 신통력으로 외워서 후세에 전하였다.
그래서
한 자라도 틀렸다 하면 자기(아난) 책임이고, 들은 그대로 전할 뿐이다.
그래서 ‘여시아문’이라 하는 것이다.
여시아문 중에서
여(如)는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하신 말씀이 서로 다르지 않고 똑 같다는 말이다.
시(是)는
경의 내용을 뜻한다.
이 경의 뜻은 ‘바른 도리를 나타낸다.’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 바로 바른 도리를 나타내고, 아난존자가 전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뜻이다.
묘법연화경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해서
‘한때 부처님께서 마갈타국 왕사성 기사굴 영산회상에서’
라고 했다.
수많은 대중들이 모여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대기중인 것이 나타나 있다.
위구성문자(爲求聲聞者) 설응(說應)-사제법 도(四諦法 度)-생로병사(生老病死)
구경열반(究竟涅槃).
위구벽지불자(爲求僻地佛者) 설응(說應)-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위제보살(爲諸菩薩) 설응(說應)-육바라밀(六波羅密) 영득(令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多羅三먁三菩提) 성(成)-일체종지(一切種智)-
“성문을 구하는 이에게는 사제법을 설하시고,
벽지불을 구하는 이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하시고,
보살을 구하는 이에게는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의
육바라밀을 설하사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케 하셨느니라.”
라고 하셨다.
성문은
삼승(三乘) 중의 하나인데 삼승이라 하는 것은
성문 연각 보살로 각각 다른 가르침으로 인해서 인도된다는 뜻이다.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불교 수행의 초입자 정도 되는 사람이다.
즉,
소승행을 닦는 그런 사람을 성문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경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부처님을 존경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연각은
성문보다 한 단계 성숙된 사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12인연법을 사실적인 체험을 통해서 혼자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 말이다.
보리살타 중에서 ‘리’자와 ‘타’자를 빼면 보살이 된다.
보리는
깨달음이고 살타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보리살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깨닫는 사람이다.
깨닫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을 보리살타라 한다.
사제법은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인데, 줄여서 ‘고집멸도’라 한다.
수행하는 데 있어서 초입자들에게 알맞은 부처님의 법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무리 내가 이루었다 하더라도 더 큰 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래서
항상 마음이 육신에 집착하고, 번뇌로 인해서 미혹한 마음에 집착하고,
욕망에 집착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만족을 못 느끼기 때문에 탐욕의 마음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미혹한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사제법의 법문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설하신 것이다.
벽지불을
연각이라고도 하는데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하신다
고 하셨다.
십이인연법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병사를 일컫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겠다 하는 굳은 마음으로써
수행 정진코자 하는 사람에게 알맞는 법이 곧 십이인연법인데 윤회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항상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고, 나고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2가지 단계를 되풀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을 윤회라 한다.
또
모든 보살을 구하는 자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하신다고 하셨다.
육바라밀은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이다.
이것을 설하시어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케 하신다고 하셨다.
육바라밀은
부처님의 지혜를 이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설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중생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보살이라는 마음으로
여섯 가지 보살행인 육바라밀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는 거사라 하고,
여자는 보살이라 한다.
육바라밀을 행하라고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하는 사람은
바로 보살의 경지의 초입에 들어 버린다.
거사도 보살의 경계로 올라서 버린다.
믿고 실천하게 되면
바로 보살의 초입 경지에 들어 버린다.
여기서
닦고 행하면 대보살의 경지가 된다.
유마경에서 유마힐을 보고 거사라고 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성불하길
바라기 때문에 이 대중들을 위해 법화경을 설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기 전에 반드시 무량의처 삼매에 드셔서
12가지 상서를 사바세계에 나타내시게 된다.
차토육서(此土六瑞)와 타방육서(他方六瑞)가 그것이다.
이 사바세계에 상서를 나타내는 것은
차토육서이고,
타방의 세계를 가져와 보여주는 것은
타방육서(他方六瑞)라 한다.
차토육서(此土六瑞)는
설법서(說法瑞), 입정서(入定瑞), 우화서(雨華瑞),
지동서(地動瑞), 중희서(衆喜瑞), 방광서(放光瑞)이다.
설법서는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기 전에 무량의경을 설하신 일이고,
입정서는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기 위해 무량의처 삼매에 드신 일,
우화서는
하늘에서 꽃비를 내리신 일,
지동서는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한 일,
중희서는
부처님의 상서 내심을 보고 회중에 모인 대중들이 큰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문이 열려
기뻐한 일,
방광서는
부처님께서 백호광명으로 타방세계의 국토를 보여주신 일
(타방육서)이다.
타방육서(他方六瑞)로는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중생을 보이신 일,
부처님을 보여주신 일,
부처님께서 설법하심을 듣게 하신 일,
중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빠른 수행으로 득도하는 것을 보여주신 일,
보살들이 보살행 하는 것을 보여 주신 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심을 보여주신 일이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상서를 보여주신 것은
묘법연화경이 얼마나 위대한 가르침인가를 미리 나타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묘법연화경 서품 제일③>
묘법연화경, 유일한 진리
부처님의 백호광명으로 해서 6가지 상서를 보고 미륵보살과 회중에 모여 있는 많은
대중이 의문을 갖게 된다.
부처님께서 저러한 상서를 내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미륵보살이 눈치를 채고 부처님의 신통변화로 나타내시는,
이 불가사의한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무량의처 삼매에서 백호광명을 놓으시고 차토육서와 타방육서를 보이시면서
선정에 들어 계시는데 누구에게 물어보면 능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금불세존(今佛世尊) 입우삼매(入于三昧) 시(是-) 불가사의(不可思議)
현희유사(現稀有事) 당이문수(當而問誰) 수능답자(誰能答者)
부작차념(復作此念) 시(是)-문수사리법왕지자(文殊師利法王之子)
이증친근공양(已曾親近供養)-과거무량제불(過去無量諸佛) 필응견차(必應見此)
-희유지상(稀有之相) 아금당문(我今當問)-
부처님께서는 깊은 삼매에 드셨으니 이 불가사의의 희유한 일이 나타남을 누구에게 물어
볼 것인가.
누가 능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생각하기를
이 문수사리 법왕자는 이미 과거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을 친근 공양하였으니
반드시 이 희유한 상을 보았으리라.
나는 지금 마땅히 물어 보리라.
이시(爾是) 문수사리어(文殊師利語)-미륵보살마하살(彌勒菩薩摩訶薩)
급제대사(及諸大士) 선남자등여(善男子等如)-아유촌(我惟忖)
금불세존(今佛世尊) 욕설(欲說)-대법우(大法雨)-대법우취(大法雨吹)-
대법라격(大法螺擊)-대법고연(大法鼓演)- 대법의(大法義) 제 선남자(諸善男子)
아어(我於)-과거제불(過去諸佛) 증견차서(曾見此瑞) 방사광이(放斯光已)
즉설대법(則說大法)
-그때 문수사리께서 미륵보살마하살과 모든 보살에게 말씀하되,
선남자들이여, 내가 헤아려 생각하건대 지금 부처님께서는 큰 법을 설하려 하시며
큰 법비를 내리려 하시며,
큰 법고동을 불려 하시며,
큰 법고를 울리려 하시며,
큰 법의 뜻을 설하고자 하심이라.
모든 선남자여, 나는 과거 일찍이 모든 부처님의 이와 같은 상서를 보았나니,
이 광명을 놓으시고 곧 큰 법을 설하셨느니라.
문수보살이 미륵보살의 질문에 대해,
과거의 부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다 알고 있는데 반드시 이러한 광명을 내시고 난 후에야
큰 법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을 한다.
“큰 법고동을 불려 하시며, 큰 법고를 울리려 하시며”
즉
법화경을 설하시고자 하실 때는 반드시 큰 상서를 내셨다 하는 뜻이다.
시시(是時)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 종삼매기(從三昧起) 인(因)-
묘광보살(妙光菩薩) 설(說)-대승경(大乘經) 명(名)-묘법연화(妙法蓮華)
교보살법(敎菩薩法) 불소호념(佛所護念)-
이 때 일월등명불께서 삼매로부터 일어나사 묘광보살로 인하여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묘법연화경이라,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보호하시고 생각하시는 바이니라.
여기서 또 과거의 일을 설명한다.
과거의 부처님이신 일월등명불께서도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고, 항상 생각하시는 것이 묘법연화경이라고 밝히신다.
또한
이렇게 큰 상서를 내실 때는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라고 해명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를 보니까 과거 일월등명불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기 전의 상하고 똑 같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그와 같은 상서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지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현재 나타내시는 6가지 차토육서와 타방육서의 상서를
과거 한량없는 겁 이전에 성불하신 일월등명불께서 법화경을 설하시기 전에도 똑같이
나타내셨다는 것을 문수보살이 대답을 하고 있다.
열반경에서
‘거친 말씀과 부드러운 말씀이 다 제일의(第一義)로 돌아간다.’
는 말씀을 하셨다.
그 뜻은 소승과 대승을 구분한 것이다.
‘거친 말’은 소승이요,
‘부드러운 말’은 법화경에 들어오기 전의 대승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42년간 설하신 대승과 소승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것이 모두가 다 어디로 돌아가야 되는가?
모두 다 묘법연화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두 가지로 말을 하면
‘거친 말씀’은 42년의 설이고,
‘부드러운 말씀’은 열반경의 말씀이다.
이것이 ‘제일의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제일의’란 묘법연화경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6가지 상서 또한 일불승, 즉 부처님이 깨달으신바 최고의 진리인 이 묘법연화경
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불법은
믿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왜 태어났는가?
공짜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잘나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어떤 이유로 태어났는가?
이 우주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몸이고,
우리는 부처님의 몸속에서 나온 생명체로 소우주인 것이다.
그것을 밝혀내신 분이 석가모니부처님이다.
그래서
불법이라 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라는 생명은 부처님의 은혜로 인해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의 대자비의 힘이 없으면 생명체가 나올 수도 없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법은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열반경에서
'신해(信解)가 원통(圓通)해야 비로소 현실에 근본이 되느니라.’
하는, 그 ‘원통’을 알아야 한다.
믿고 이해함이 하나로 통일 되어야 한다.
믿는 것만 해서도 안 되고, 이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원통이라 하는 것이다.
믿는 마음만 가지고 행이 없으면 자기 최면에 걸려 기복적인 마음으로 욕망만
늘어나게 되고, 이해만 있으면 사견(邪見)이 충만해진다.
또한
신해가 원통하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고 실천하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법화경에 대한 믿음과 이해함이 갖추어 졌을 때 하나가 된다.
비로소 그것이 행실의 근본이 되어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마음과 이해한 것을 행으로 실천하는 것을 진실하게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묘광보살이 일월등명부처님의 법을 듣고 수많은 겁 동안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때 보살 한분이 득장인데, 일월등명불께서 수기를 주신다.
이 보살이 다음에 성불을 하시는데,
이름이 정신 ․ 다타아가도 ․ 아라하․ 삼먁삼불타 라 하시고,
일월등명불께서 밤중에 무여열반에 드시었다.
다타아가도는 여래(如來)라는 뜻이고,
아라하는 응공(應供),
삼먁삼불타는 정변지(正便知)이다.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다타아가도, 아라하 삼먁삼불타, 즉 여래 ․ 응공 ․ 정변지이다.
묘광보살이
묘법연화경을 수지해서 팔십소겁이라는 한량없는 세월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묘법연화경을 설했다.
법화경을 설하시는 동안 일월등명불의 여덟 왕자는
묘광보살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하였는데, 보살 또한 그들을 가르치고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 마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잘 가르쳐서 인도했다.
그 중 최후로 성불하신 분이 이름이 연등불이라 하셨다.
묘광보살의 팔백 제자 중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구명이었다.
이양(利養)을 탐착하여 비록 경전을 읽고 외울지라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리기를 잘했다.
그러나
구명은 경을 읽는 선근을 심었고, 또 한량없는 겁 동안에 이 경을 읽은 공덕으로
부처님을 만나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함으로써 미륵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수보살 자신은 과거의 묘광보살이었고,
미륵보살은 당시의 구명이었다는 것이다.
일월등명불께서 멸도하신 후에
묘광보살이 수많은 겁 동안 묘법연화경을 설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중 가장 훌륭하고
부처님의 지혜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바로 묘법연화경이라는 것을 밝힌다.
또한
과거의 일월등명 부처님께서 행하신 일,
현재의 부처님이 행하시는 일,
또
앞으로 미래의 오십육억 칠천만년 이후에
미륵 부처님이 나오시더라도 똑 같을 일을 행하시고
묘법연화경을 설하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법화경의 설법은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도 변화가 없는 진리가 곧 묘법연화경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밖에 없다.
모든 사물은 다 변하게 되어 있고,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묘법연화경이
유일한, 변함없는 진리라 하는 것을 여기서 밝히시는 것이다.
<묘법연화경 서품 제일④>
법화행자는 세상의 눈이 되어야
우리들이 불도 즉 묘법연화경을 행하게 되면 얼마나 큰 힘이 생기는가에 대한 설화가 있다.
옛날에 중국의 조언이라는 고승이 있었다.
이 조언 스님은
여러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목숨은 임시로 받은 것이다.’
라고 설하셨다.
사실 이 몸은 부처가 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부처 되는 것이 큰일이니,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설사 임시로 이 몸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런 의미에서 몸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조언 스님은
‘인간의 목숨은 임시로 받은 것이다.’
이런 말을 항상 하셨다.
임시로 받은 것이지만 바닷물이 밀물 썰물이 있는데, 밀려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그 물은 줄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바닷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똑같다.
그와 같이 우리 인간들도 이 세상에서 목숨이 없어져도,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었다가 또 다시 태어났다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숨을 받고 그냥 자꾸 윤회만 계속 되풀이 할 것인가?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윤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 즉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묘법연화경을 설했으니 너희들이 받아 가져라”
이 말씀이다.
생명은 영원하므로. 나고 죽고 하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조언 대사는
항상 이렇게 말했는데, 어느 날 제자들에게 수행을 바르게 하고 있는가 물어 봤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바닷물과 같아서 밀려왔다가 밀려갔다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조언 대사가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반복했다.
어느 날 큰 함성 소리가 들렸다.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소리였다.
적들이 칼을 들고 설치니까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
제자들에게 평소에 그렇게 설해 주었건만
그 뜻을 받아서 행하지 못하고 목숨을 아껴 도망쳤던 것이다.
조언 대사 혼자 방안에 앉아 있었다.
‘허허, 입만 살아 참새처럼 조잘대더니만 다 도망갔구먼.
아직까지 더 가르쳐야 되겠군.’
조언 스님은
이렇게 마음먹고 자신은 군인이 들어와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떡 하니 방에 앉아 있었다.
대장이 들어와 큰소리를 쳐도 조언 대사가 태산 같이 꼼짝도 않으니,
“이 자가 귀가 먹었나 눈이 멀었나 ”
하면서 칼을 빼들고
“야 이 중놈아! 이 칼이 보이지 않느냐?”
호통을 쳐도 묵묵부답이라. 군사 대장이
“너의 목이 떨어질 것인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느냐?
왜 싹싹 빌지 않느냐?”
그제야 조언 대사가 눈을 뜨고 대장을 쳐다보니 서슬이 시퍼랬다.
“ 이 보소. 그대가 고함을 지르고, 칼로 위협을 해 봐야
절대로 놀라지 않는 중이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자 대장은
조언 스님의 위엄에 눌려서 칼을 거두고 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스님, 저는 스님을 헤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군사들을 좀 쉬게 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하면서 공손히 나왔다는 설화가 있다.
불도를 바르게 행하면 이렇게 생사도 초월하게 된다.
이 법을 바르게 행하면 실로 두려움이 없어진다.
조언 대사가 군사들에게 그런 위협을 받아도 두려움이 없었기에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승도 직접적으로 온갖 위협,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법화경을 바르게 수지하고, 바르게 전해야겠다.”
하는 믿음과 이해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법화경을 바르게 믿고 행하면 그러한 힘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모든 것이 즐겁고 기쁘게 보이고,
쉽게 보이고,
어렵게 보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스스로 공부를 해보면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때를 기다릴 줄 몰라서 그렇지, 때라는 것이 있다.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살았다고만 해서 부처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되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 마음과 같이 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가지고 나온 복의 그릇에 담긴 것을 다 써버리면
과보를 받게 된다.
자신의 복 그릇에 복을 끊임없이 담아야 된다.
그릇을 채우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이치를 모르니까 그만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공부하고자 하는데 있어서는 먼저 사물을 바르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물을 바르게 보려면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삼관(三觀)을 익혀야 한다.
가관(假觀), 공관(空觀), 중관(中觀)이 그것이다.
가관(假觀)은 유(有) 또는 차별관(差別觀)이라고도 한다.
가관은
모든 사물이 같은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은,
생명이 있든 없든, 같은 게 없다.
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차이는 있지만 그것으로 우열을 나누어 차별하여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나온 특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서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 ‘다르다’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세상을 바르게 살아 갈 수가 있다.
모든 사물이 왜 다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살 수밖에 없다.
중생심으로써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가 없다.
공관(空觀)은 평등관(平等觀)을 말한다.
여기서 공(空)이라 하는 것은 평등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은 모습이 다 다르다.
설사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라 할지라도 얼굴도, 키도, 성격도 다 다르다.
다 다르지만 분명히 그 중에서 한 가지 만큼은 같은 게 있다.
그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성(佛性)”이다.
이 “부처의 성품”은 누구나 다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평등관인 것이다.
중관(中觀)은 통일관(統一觀)이라도 한다.
차별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평등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차별과 평등, 이 양쪽을 잘 분별해서 보아서 아는 것이 통일관이다.
명예욕 없는 사람 드물고, 욕심 없는 사람 없고, 애욕이 없는 사람 없다.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이 명예욕이다.
욕심은 물질적으로 넉넉히 살기 위해서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명예욕은 남을 짓밟아야 자기 자신이 명예를 얻는다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것은 명예가 아니다.
명예를 얻는 것은
내가 바르게 행하였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몸소 실천을 해서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었을 때
‘저 사람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인정을 받아야 되는데.
자기 자신이 욕망에 빠져 있다면 결코 바른 명예욕이 아니다.
욕심 부리고[탐貪], 성내고[진嗔], 어리석고[치痴],
이러한 부분들을 없애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써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우선 경전을 읽어야 한다.
경전을 읽는데 있어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구독(口讀), 입으로 읽는다.
심독(心讀) 마음으로 읽는다.
색독(色讀) 몸으로 실천한다.
이 세 가지로 경을 읽어야 한다.
신해(信解)가 원통(圓通)하지 않으면 바른 불자가 될 수 없다.
즉
믿고 이해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만 하게 되면 사견이 늘고,
믿음으로만 가게 되면 기복적,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신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을 읽을 때
입으로 소리 내서 읽고,
마음으로 소리 내서 읽고,
또 몸으로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
참선을 주로 주장하는 스님들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하는 것은 그냥 마음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을 가졌을 때는 반드시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반드시 부처님의 하나밖에 없는 묘법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것은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고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실천이 없는 마음만으로는 되는 것이 없다.
마음만으로는 무엇인들 못하는가.
저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도 손으로 탁 잡는다 생각할 수 있고,
구름 위에도 턱 앉을 수 있고,
교통이 혼잡하면 내 차만 달랑 날아서 저 앞에 갈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먹는다고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을 망상(妄想)이라 한다.
일체유심조란
마음의 밭에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씨(원력)를 심으면 언제인가는 성사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동안 반드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행이 따르지 않으면 부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경문도 몸으로 해석을 한다.
입과 몸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입만 가지고 해석 하는 것이 아니다.
몸 즉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해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음으로 믿고 받아 가지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경을 읽는 의미가 된다.
우리 인간은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냥 남한테 욕 안 먹는다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가장 선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 선한 마음을 닮아 가려고 해야 한다.
주위 환경으로 인해서 작은 것에도 영향을 받고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자기 자신이 부족함을 스스로 먼저 알아야 되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된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배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내가 배워 나가야 한다.
바르지 못한 것을 보고 바르다고 착각하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자꾸 그렇게 끌려 다니게 마련이어서
바른 것을 아무리 가르쳐 줘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견을 바른 것인 줄 알고 실수를 한다.
실수한 것을 가르쳐줄 줄도 알아야 하고,
실수한 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인정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또한 남을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용서라 하는 것은 상대가 잘못을 지적해 주었을 때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아니하든 개의치 않는 것이다.
법화경을 배우는 사람들은 세상의 눈이 되고자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상 묘법연화경 실상 묘법연화경 나무 평등대혜 실상묘법연화경 _()()()_
實相 妙法蓮華經 實相 妙法蓮華經 南無 平等大慧 實相妙法蓮華經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