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서품 제일①>
‘묘법연화경’이 일승 진실법임을 밝히시다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미륵당지(미륵당지) 이시(爾時) 묘광보살(妙光菩薩)
기이인호(豈異人乎) 아신시야(我身是也)구명보살(求名菩薩)
여신시야(汝身是也) 금견차서(今見此瑞) 여본무이(與本無異)
시고(是故)유촌(惟忖) 금일여래(今日如來) 당설(當說)
대승경(大乘經) 명(名) 묘법연화(妙法蓮華) 교보살법(敎菩薩法)
불소호념(佛所護念)-
미륵이여 마땅히 알라.
그 때 묘광보살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느냐.
내 이 몸이요, 구명보살은 곧 그대니라.
지금 이렇게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를 보니
옛날 일월등명부처님의 상황과 조금도 그 때와 다름이 없는지라.
이런고로 헤아리건대,
오늘 부처님께서 마땅히 대승경을 설하시리니 이름은 묘법연화경이라,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이니라.
여기까지는 방편을 나타낸 부분이다.
이제
앞으로 방편을 버리시고,
진실을 부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부처님 가르침 즉 방편으로 하신 말씀을
수타의설법(隨他意說法)이라 한다.
수타의설법은
듣는 자의 근기에 따라서 설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근기에 따라서 설해주시다 보니까 이제 진실을 나타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방편만 설하게 되면
부처님의 진실을 나타낼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드디어 때가 되어 부처님께서 방편을 버리고
진실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진실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
이것을 수자의설법(隨自意說法)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를 그 진실 그대로 설하시는 것.
이것이 수자의설법이다.
진실을 나타내는 것에 있어서는 섭수(攝受)와 절복(折伏)을 분별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섭수와 절복이라는 두 가지 자비심을 나타내신다.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가?
다른 사람이 부처님의 뜻에 맞게 행하고 있는가?
부처님 뜻에 맞으면 상대를 칭찬해야 한다.
그리고 더욱 그가 분발할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것을 섭수라 한다.
한편,
부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뜻에 맞게 행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것을 절복이라 한다.
그런데
절복을 무조건 배척하고 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섭수하는 것이다.
가르쳐서 부처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게 하는 것이 절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부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절복의 대상이 된다.
아념과거세(我念過去世) 무량무수겁(無量無數劫)
유불인중존(有佛人中尊) 호일월등명(號日月燈明)
세존연설법(世尊演說法) 도무량중생(度無量衆生)
무수억보살(無數億菩薩) 영입불지혜(令入佛智慧)
불미출가시(佛未出家時) 소생팔왕자(所生八王子)
견대성출가(見大聖出家) 역수수범행(亦隨修梵行)
시불설대승(時佛說大乘) 경명무량의(經名無量義)
어제대중중(於諸大衆中) 이위광분별(而爲廣分別)
불설차경이(佛說此經已) 즉어법좌상(卽於法座上)
가부좌삼매(跏趺坐三昧) 명무량의처(名無量義處)-
내 생각하니
과거 세상 한량없는 무수겁에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이름은 일월등명이시라.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어 한량없는 중생과 수없는 억만 보살을 제도하사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 지혜에 들게 하심이라.
부처님께서 아직 출가하지 아니하셨을 때의 소생인 팔 왕자는
대성의 출가하심을 보고 또한 따라서 청정한 수행을 닦았느니라.
그 때 부처님께서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무량의경이라,
모든 대중 가운데서 널리 분별하여 설하셨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시고 곧 법좌 위에서 가부좌를 맺으시고 삼매에 드시니
이름이 무량의처라.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설하시는데 있어서 그냥 맹목적으로 앞뒤 없이 설하시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순서에 입각해서 설하신다.
과거의 부처님이나 일월등명불께서나
지금 석가모니불께서나
앞으로 오실 미륵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다 이 묘법연화경을 똑같이 설하신다.
방편을 설하시고 난 다음에 진실을 드러내신다 하는 것이다.
“견대성출가(見大聖出家) 역수수범행(亦隨修梵行)”
‘역수수범행’에서 ‘범’이라 함은 ‘청정하다’는 뜻인데,
여기서 ‘청정한 수행을 닦았다’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자기를 버리지 않은 청정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청정을 얻을 수 없고,
청정한 행동을 할 수 없고,
바른 마음,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 잘못하고 있으면서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청정한 마음이 될 수 없다.자기 자신을 버린 상태에서는 욕심도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정은 출가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출가자는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근래에 젊은이들이 출가하는 목적이 6개월 참고 견디면
불자들에게서 스님 소리 들고 공경 받으면서 평생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말
부처가 되기 위해서 출가해야지 그러한 욕심을 비우지 못 하고 출가하면
견디기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부처님의 제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불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출가를 하는 것도, 청정한 생각도 어디서 나오는가?
무엇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가?
선(善)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선(善)이란 부처님 마음이다.
부처님 마음은 곧 하나밖에 없다.
일불승인 법화경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善)의 근본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다.
선의 근본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묘법연화경에서 나온다는 이 말씀이다.
부처님의 마음도 묘법연화경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경에서 부처가 나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 조상을 이 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 했다.
아무리 잘 공양하고, 잘 입히고, 좋은 집에 사시게 하더라도 생사를 초탈할 수 있는 이 법에 귀의
시키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이다.
물질적으로 좀 부족하거나 풍족하거나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법을 바르게 믿으면 효도도 하게 되고, 국가에 충성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은혜를 바르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은혜나 내가 태어난 나라의 은혜를 모르면 안 된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이 33분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삼십삼천, 삼십삼인, 연말 타종 33번. 이 숫자에도 의미가 있다.
특히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3인은.
삼십삼천 중에 있던 제석천이 한 사람씩 내려와서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으로 되돌려 놓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들이라 생각한다.
이 사실은 억지로 끼어 맞춘 게 아니다.
왜 제야의 종을 33번을 치는가?
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는가?
미래 미륵부처님이 나오셔야 하는 곳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삼십삼천에서 내려오신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는 확신이 선다.
사찰에서 새벽종 치기 전에 범종이 있는 곳에서는 매일 33번을 친다.
이 소리는 33천의 모든 중생을 깨우고,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우리의 세상살이 중,
하나하나의 모든 것이 실은 불법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 종교를 내세우기 위해서 부정하고 있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있는 게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화경을 설하시기 직전에 부처님께서
차토육서(此土六瑞)라 해서
6가지 형태로 신통력을 내셨고,
타방육서라(他邦六瑞) 해서
사바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도 6가지 상서로운 것을 보여주셨다.
사바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국토의 부처님들과 보살 성문 연각들,
수많은 중생들이 수행하고 있는 것을 신통력으로 다 보여주신다.
그것을 육서라 한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상서를 내시는 것을 보고,
모여 있는 대중들이 이해가 안 가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 중에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표해서
‘부처님께서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러한 상서를 내시는가?
이 의문을 누구에 물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인가 해서
문수사리법왕자가 과거세에 수많은 부처님을 친견 공양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부처님께서 이러한 상서내심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싶어 질문을 한다.
그러니까
문수사리법왕자가 답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큰 법을 설하시기 직전에 이러한 상서를 내셨다.
과거의 부처님들께서도 이러한 상서로써 큰 법이 무엇인가를 밝히셨다.
지금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이런 상서내심은 신통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설하실 묘법연화경이 큰 법임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서품의 핵심이다.
‘묘법연화경’이 일승 진실법임을 밝히신 품이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②>
구원실성의 법본존
법화경으로서 점안의식을 하지 않으면 부처라 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열반경에 못을 박아 놓으셨다.
“목화상(木化像) 개안공양(開眼供養)은 오직 법화(法華)에 한할지니라.”
목화상이라 함은
나무를 다듬어서 불상을 만든 것이고,
개안공양은 부처의 눈을 띄우는 의식인데,
설사 부처님을 만들어 놓고도 부처의 눈을 뜨게 하는 공양은
오직 법화경으로써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불상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법화삼부경 중 결경인 ‘보현보살행법경’에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을 해 놓으셨다.
“이 대승경전(법화경)은 모든 부처님의 보장이며,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의 안목이니라.
또 삼세의 모든 여래가 출생하시는 종자이니 이 경을 가지는 자는
곧 부처님의 몸을 가지고 곧 부처님의 일을 행하는 자이니라.”
왜 열반경에서 불상의 개안공양은
오직 법화경에 한한다고 해 놓았는가를 이 보현보살행법경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또 “이 방등경은 묘법연화경이다.
이 방등경은 모든 부처님의 안목이니
모든 부처님은 이것으로 하여 다섯 가지 안목을 갖추셨느니라.”
“부처님의 세 가지 종류의 몸은 방등에서 나오느니라.”
세 가지 몸이란
보신 ․ 법신 ․ 응신
즉,
비로자나, 노사나 , 석가모니불을 이르는 것인데,
법화경이 없다면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모니불이
출현하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대법인이니 열반의 바다에 깊이 새겨져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대법인이라 하는 것은 법의 도장이다. 법의 인감이라는 뜻이다.
여러분도
인감도장 있을 것이며, 그것이 본인을 대리하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바로
부처님을 대신하는 대법인이 묘법연화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묘법연화경은 깊은 바다에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법인이(인감) 아주 깊이 새겨져 있다.
참 묘하게 말씀을 해 놓으셨음을 알 수 있다.
대승 ․ 방등 ․ 대열반의 바다란 다 같은 한 말, 묘법연화경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바다 중에서
“세 가지의 청정한 부처님의 몸이 나왔거늘 이 세 가지 몸은
인간과 하늘의 복전이니 응공 중에 가장 으뜸이니라.”
여래십호 중에 응공(應供)이라는 명호가 있다.
응공은 공경, 공양을 받을만한 사람을 두고 응공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당연히 응공이시다.
그런데 아라한 ․ 성문 ․ 연각 ․ 보살도 응공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공경 공양을 받을만하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응공이라 한다고 해서 성문의 응공이나 부처님의 응공이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무량의경 설법품에서
“말은 같을지라도 그 뜻은 각각 다름이 있다.”
라고 하셨다,
성문 연각 보살을 두고 응공이라 하는 것과
부처님을 두고 응공이라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하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곳곳에 승복을 입고 부처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모두 다 부처다.
부처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제 진짜 부처가 되는 것, 이것이다.
이 경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은 싯달다 태자로서 정반왕인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다.
사람으로서 깨달은 분이라고 해서 소생으로서 신이라 한다.
깨달은 사람으로 보게 되면 시성정각으로서 인본존이 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깨달아 본존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본존인 사람으로서 부처님이며, 능인이라 한다.
반면에
이 방등경인 묘법연화경은 능생이라 한다.
묘법연화경은 능인을 나오게 한다.
즉
부처를 나오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묘법연화경은 부처님을 나오게 하는 경이므로 신령스럽다 하는 것이다.
즉
묘법연화경은
부처를 나오게 하는 능생으로서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신령스러운 것은 신(神)이다.
사실은 신자 쓸 때 귀신(鬼神) 신(神)자를 쓰지만
‘귀신이라 하는 것’과 ‘신령스럽다 하는 것’과 뜻이 다르다.
이것은 나쁜 신이 아니고 선(善)한 신을 말한다.
이 선신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 밖에 없는 신,
이것은 천상천하에 유일한, 절대적인 신이다.
이것을 구원실성의 법본존이라 한다.
부처를 생하게 하는,
부처님을 나오게 하는 법이 묘법연화경이요,
이 묘법연화경은 실로 신령스러운 유일신으로,
이 우주 삼라만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이다.
이것이 곧 구원실성의 법본존이다.
구원이전에 부처로, 즉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겁 이전에
이미 부처로서 만 중생을 구원하는 법본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능생이라 한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으로 말을 바꾸고 유일신이다, 하는 것이다.
스님 중에는 이십년 동안 토굴생활하다 나온 분이
‘예수와 석가는 같다’고 하는 대망어(大妄語)를 서슴치 않고, 한 일이 신문에
떠들썩하게 보도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 자에게 구름같이 사람이 모여들었다. 대 스타처럼.
지금 시대가 그런 시대이다.
이 법본존은
바로 천상천하에 오직 한분밖에 안 계시는 유일신이 되는 것이다.
무조건
예수와 석가모니 부처님을 동일한 경계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모르고 하는 짓임을 우리 불자들은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제자라고 하면서,
법복을 입고 그런 말을 하니 답답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행법경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만 대승의 방등경 즉, 묘법연화경을 가져서 외우는 까닭으로 모든 보살이
이 법을 가진 자(수지-제목을 부르는 자), 제목을 부르는 자를 공양하시느니라.”
부처님으로부터 공양을 받는 큰 이익이 생기는 것이다.
이익도 내가 오게 해야 된다.
부처님의 마음이 감응되어서 내 부처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나가 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절에 가서 부처님한테
‘복 좀 주세요.’ 하면서 엎드려 빈다고 받는 게 아니고
감응이 되어야 하며 진실한 법을 받아 지녀야 한다.
행법경에 이런 말씀도 있다.
“너희들이 지금 대승경전을 읽고 가져서 외우는 바는 부처님의 경계이니라.”
보살의 경계도 아닌 부처님의 경계라 했다.
이렇게 좋은, 이렇게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스님이
법화경의 진실한 뜻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법화경은 맞는 것 같더라.’
그러면
법화경에 ‘틀린 것도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안타까운 말이다.
이 법은
보살심을 가지고 남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만 좀 생기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잘 될 것 같은데, 하는 사람,
어려운 사람이 와서 한 단계 한 단계 편안해 지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보람이 있다.
여러분들도
나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한번 법문을 들어보라고 인도하면 그것이 곧 보살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이 법화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가 있다.
내가 실천하지 않으면 이해가 더딜 수밖에 없다.
사람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좋은 것은 자기만 가지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잘못 된 것이다.
좋은 것은 내가 갖지 못하더라도 남을 줘야 된다.
그러므로
내가 남에게 청해서 신심을 갖도록 하면 내 신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덕이 나에게 더 쌓이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 짓지 못한 복을 금생에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그렇게 사는지 가슴이 아프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직 부처님의 지혜인 묘법연화경을 철저한 믿음의 바탕으로 해서 벗어나라고
권유할 뿐이다.
모두 다 그런 마음 가지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부처님 마음과 같이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잘 안되는데, 자꾸 닮으라고만 하느냐?’
그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면 안 된다.
자꾸 하다 보면 변하게 되어 있다.
묘법연화경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법을 바르게 하면 마음공부는 저절로 된다.
그것의 이치를 모르고 앉아서 고요한 마음만 즐기고,
문자에 대한 의심만 하고 있으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치심(법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저마다
바른 마음을 가지면 모두 복 받는다.
안되는 일이 없다.
다 된다.
그렇게 믿는 마음이 내 스스로 확실해야 한다.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
‘틀림없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나도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③>
묘법연화경의 권속
방편품은
법화경을 설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신 법인데 부
처님께서는 곧 일불승인 법화순원의 원교를 설하시고자 말문을 여신다.
부처님께서는
방편품에서 삼승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일불승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 방편품 자체가 42년 동안 설하신 가르침 자체가 된다.
모두 이 일불승인 묘법연화경 하나에 들게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42년간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다는 것을 밝히신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둘이라 함은 성문 ․ 연각이고
셋 이라함은 성문 ․ 연각 ․ 보살법인데,
하나를 이렇게 나누어 설하신 것은
곧 일승법인 법화순원의 원교를 밝히시고자 한 것이다.
방편품에서
‘방편’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진실한 가르침에 끌어 들이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편의적으로 설하신 설법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묘법연화경에서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卽身成佛]”
는 것을 밝히시고,
그 수단과 방법을 방편품에서 중생들에게 설하여 이 법에 들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불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지혜는
감히 보살로서도 알 수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방편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진실을 알게 해 주는 그런 수단과 방법이다.
그러나
방편이라고 해서 다 바른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행하시는 방편은 가장 바르지만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말하는 방편은 사견과 거짓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절에 다녀도 부처님이 무엇인가.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나오셨는지 바르게 알지 못하는 불자들이 많다.
껍데기만 안다.
수박 겉핥기처럼 속은 전혀 모르고 껍데기만 보고 아 저것이 불교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 절하고 기도하면 그게 다인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말은 거짓말이 되지만,
다른 사람을 불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그것이 곧 방편이다.
그것을 바르게 잘 분별해야 한다.
‘방편은 세 가지로 분류한다.’
는 천태대사의 가르침이 있다.
⑴ 범용방편(凡用方便): 많이 통용되고 있는 하나의 방법
⑵ 능통방편(能通方便): 많이 통용되고 있는 하나의 수단
⑶ 비묘방편(秘妙方便): 오직 법화경에 들어야만 성립된다.
범용방편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른 가르침을 설해서 이익을 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범용방편을 쓰셨는데, 중생들을 불법으로 인도하기 위해 설법하시되
각자 근기에 맞게 설하셨다.
예를 들어
성문들에게는 사제법,(고제 ․ 집제 ․ 멸제 ․ 도제)을 아함경에서 밝히셨는데,
이것은 중생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떠한 방법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그대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렇게
성문에게는 사제법을 설하시고,
연각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하시고,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하셨다.
이 성문 연각 보살법을 설하심으로 일불승인 진실의 문으로 들어오게 해서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신 방법이 부처님이 쓰신 범용방편이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이 전부 범용방편에 해당하는데 진실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
불법으로 인도해서 절에 오게 하고 법문을 했으면
차츰 가르쳐 화엄경이나 반야경, 금강경(방편)에 머물게 하지 말고
반드시 진실한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그 한 곳에 집착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각자의 근기에 맞게,
즉
성문에게는 사제법을,
연각에게는 십이인연법을,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하셔서 바로 일불승인 진실의 문으로 들어오게 해서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신 것이다.
능통방편이란
진실법인 일불승인 묘법연화경의 가르침에 들어가는 문이다.
즉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진실한 문’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실한 문’이 없다면 능통방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진실한 문’에 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며,
‘문’이라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 능통이다.
이 법에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이 법에 들어와서 일불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방편품을 배움으로 해서 능통방편에 들었고,
이 ‘문’이란 ‘문’에 들어 와서 능통방편을 듣는 순간 일불승에 들어왔다.
이 법화경에 들면 법화경만이 진실한 가르침이고,
그 외의 경은 방편의 가르침으로 소승경이 된다.
법화경은 진실이요,
법화경 이전에 있었던 것은 모두 다 방편이라는 뜻이다.
비묘방편은
부처님께서 밝히지 않은 것을 밝히는 것을 말 한다.
42년간 설하신 방편의 경에서는 삼승이 곧 일불승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일불승을 밝히지 않는 것을 비방이라고 한다.
이 비방을 방편품에서 다 밝히신 것이다.
법화경을 설하시기 이전의 가르침은
방편의 가르침이고,
지금 설하는 묘법연화경이 진실이며,
삼승법은 일승법을 설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신다.
이것을 밝힐 때 ‘비묘방편’의 ‘묘’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묘'를 말하자면 방편품에서 방편이라는 것 중에 ‘편’자에 해당한다.
다시 정리하면
이 비방의 ‘비’자와 ‘방’자는 삼승법을 뜻한다.
즉 성문 연각 보살법을 뜻한다.
다음, 삼승법이 일승법[三乘卽一]이라는 것을 ‘
묘편’이라고 하기 때문에 ‘비묘방편’이라고 한다.
비묘방편의 ‘묘’자와 ‘편’자에 의해서 묘법연화경 방편품이라고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묘방편’은 묘법연화경에만 한하는 방편이다.
능통은
일불승을 드러내기 위해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문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비묘방편이라는 것은 이 묘법연화경 방편품에 한하는 방편이다.
비묘방편의 ‘비’자는 석가모니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기 때문에
‘비’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앞에서 이미 증명해 놓으셨다.
무량의경 설법품에서
“이 경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느니라.”
라고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묘법연화경에 한해서 이 방편품의 비묘방편이 바로 성불이 되는 것이다.
비묘의 ‘묘’자라고 하는 것은 보살로서도 부처님의 지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쓰인 것이다.
실로 묘하다.
그런데
이 시대의 중생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대보살도 감히 부처님의 지혜는 알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말법에 사는 중생들은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법화경에 들게 되면 참으로 묘하다.
비록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이 몸이 그냥 생겨 난 것이 아니고
구원태초로부터 흘러 흘러 윤회해서 지금의 이 몸을 받았다.
몸을 받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기회를 부여 받은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안 계셨으면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다.
원래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본불의 권속이 아니면 불성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몸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불이라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구원태초로부터 부처님의 권속(가족)이다.
거기서부터 살아왔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모르고 여태까지 윤회하여 흘러 왔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어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그것을 알고 부처가 되라는 가르침이다.
본불의 권속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바로 이 묘법연화경의 권속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이 경에서 나오셨다.
이 경이 아니면 부처님이 나오실 수 없다.
이 우주가 법화경이다.
법화경을 무시하는 것은 내 자신을 무시하는 이치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 그대로가 부처다.’
라고 깨닫는 것이 비묘방편이 된다.
이해가 가는가.
법화경하면 ‘최고 높은 경이다. 좋은 경이다.’ 하면서
‘이 법은 높기 때문에 들어가기 힘든다.’
고 하는 것은 불자들을 무시하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알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 된다.
이시 세존 종삼매 안상이기 고 사리불 제불지혜 심심무량 기지혜문 난해난입 일체爾時 世尊 從三昧 安詳而起 告 舍利佛 諸佛智慧 甚深無量 其智慧門 難解亂入 一切성문벽지불 소불능지 소이자하 불증친근-백천만억 무수제불, 진행-제불 무량도법 聲聞辟支佛 所不能知 所以者何 佛曾親近-百千萬億 無數諸佛, 盡行-諸佛 無量道法용맹정진 명칭 보문, 성취심심-미증유법 수의소설 의취난해
勇猛精進 名稱 普聞, 成就甚深-未曾有法 隨宜所說 意趣難解-
그 때 세존께서 삼매로부터 조용히 일어나시어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느니라.
그 지혜의 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움이니,
일체의 성문 벽지불이 능히 알지 못하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부처님은 일찍이 백천만억의 수없는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시어 모든 부처님의
한량없는 도법을 다 행하시고 용맹정진하시어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느니라.
심히 깊고도 깊은 미증유의 법을 성취하시어 근기를 따라 설하시는 뜻은 알기 어려움이니라.
여기서부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스스로 설하시는 설법이 된다.
이것을
수자의설법(隨自意說法) 또는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 한다.
이 법화경을 제외한 경전의 가르침은 수타의경(隨他意經)이라고 하고,
중생의 근기에 맞춰 설하신 것이라 해서 대기설법(待機說法)이라고도 한다.
대기설법은
남을 위해서 설하는 가르침이다.
남을 위한다는 것은 근기에 따라 설한다는 뜻이고,
수자의설법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를 모두 낱낱이 드러내셔서 모든 중생들이 이 법에 들어
와서 당신과 똑 같은 부처가 되라는 뜻이다.
경문에서
‘조용히 일어나셨다[安詳而起].’ 라는 뜻은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유연한 모습을 뜻한다.
지금까지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참 뜻을 밝히지 않으셨다.
그러나
지금 삼매로부터 조용히 일어나시어 부처님이 출현하신 참 뜻을 밝히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삼매에서 조용히 일어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그냥 ‘조용히 일어나셨다’ 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문구에는 아주 특별한 뜻이 들어 있다.
‘문저 비침’ 즉 ‘문자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다’
는 뜻이다.
그 속에 제목의 큰 뜻이 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말법에 사는 중생들은 반드시 묘법연화경의 뜻에 의지하고,
부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신 요의경에 의지하되,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며,
말에 의지하지 말고,
식에 의지하지 말며,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저에 감춰 두신 것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삼매로부터 조용히 일어나시어
침묵을 깬다는 뜻이다.
이 법화경이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모여 있는 대중들만을 위한
설법이 아니라 영원히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이 경전의 제목 ‘묘법연화경’
다섯 자인 본불을 감춰 두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법에 사는 중생들은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바르게 듣고 바른 마음으로 믿고
바르게 실천해야 한다.
불교의 신앙의 대상은 묘법연화경이다.
부처님의 그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서
매일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묘법연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이것을 다 밝히시기 위해 ‘조용히 삼매로부터 일어나신 것’이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④>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극락이 아니라
부처님은
누가 묻지 않아도 이 법은 과거의 부처님이 행하신 바대로
내가 이제 모든 중생들을 위해 이 법을 설하신다 하시고
스스로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셨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다” 고 하셨다.
부처님의 지혜(知慧) 두 자 중에 “지”자는 차이와 차별의 면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며 분별을 많이 한다.
모든 것은 차이가 있고 차별이 있다.
이런 것들을 낱낱이 다 아시는 힘이 알지(知) 지혜의 지가 된다.
“대승의 장”에 보면
사물의 차이점을 아는 힘이 “지"라고 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이 비추어 본다는 것이다.
조사가 화두를 깨친 것을 두고 부처님께서
‘그런 도리가 있느냐’고 질문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사물의 차이를 안다는 것은 모두를 다 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어도 분명히 어느 한 부분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
다 아신다는 것이다.
모두 틀리는 것 같지만 하나는 같은 것이 있다.
중생들을 비유해서 이야기 해 보면, 얼굴은 각각 다 다르다.
그런데 같은 것이 있다.
부처의 성품인 “불성”이 있는 점이 같다.
우리는 본불의 권속이다.
바로 묘법연화경의 권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모양이 달라도 생명이 있는 것에는 불성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이것까지도 부처님이 다 아신다.
이것을 모르면 부처님이 아니다.
이것이 지혜의 “지”다.
“혜”는 이 평등한 면을 분별해서 아는 힘 이것이 “혜”다.
‘혜’를 다른 말로 하면
잘 분석해서 이 분석한 것을 다시 낱낱이 풀어서 아는 힘이다.
평등은 누구나 다 똑같다는 것이다.
똑같지만 또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 같은 부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
이것이 평등이다.
그래서
이 평등을 “공(空)”이라고도 한다.
이 평등을 아는 힘, 이것을 “혜”라고 한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하는데 겉모양이나 능력은 다르지만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화엄경, 반야경에까지
‘여자의 몸’은 지옥의 사자라 했다,
그래서 여자는 성불 못한다고 했다.
법화경에 들어와 버리면
‘성불한다’고 했다.
그래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법화경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평등해져 버리는 것이다.
법화경에 들기 전에는 성불하지 못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법화경 공부하려고 하면 그냥 ‘최고 높은 경이다’
이렇게 해 버리고 너희들은 그냥 ‘관세음보살이나 찾아라.
너희들이 무슨 성불 같은 소리를 하느냐’ 이러는 것이다.
42년 동안 법화경을 설법하시기 이전의 가르침은
여자와 남자는 구분이 있고, 차별이 있다.
그래서
비구 250계, 비구니 380계의 계율(戒律)을 주신다.
42년의 가르침으로는
여자는 성불할 수 없는 몸이기 때문에
‘너희들(비구니)에게는 계율을 더 주느니라’
고 하신 것이다.
‘지’와 ‘혜’는
한쪽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고, 양쪽을 다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이다.
다시 말해
차별하는 것과 평등이 다 갖추어져야 한다.
차별된 모습을 다 알아야 한다.
또 평등한 면도 다 알아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는 한량이 없고 심히 깊다고 하신 것이다.
그 지혜의 문은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아직 멀었으니, 관세음보살이나 불러. 이러는 것이다.
법화경을 제대로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여러분들은 누구나 다 법화경을 배울 수 있고,
법화경에 들어와야 성불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법화경은 누구나 다 들어와서 성불할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라.’
이것이 부처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다.
이렇게 진실을 가르쳐 주면 잘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을 찾다가 여기 와서 보니
‘제목’을 부르니까 거기에 의아심을 갖는 것 같다.
그것은
제목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해난입(難解難入)이라는 것이다.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가게 하는 것을
‘방편’이라고 하고, 방편을 ‘지혜의 문’이라고 했다.
즉 능통방편이 방편품을 설하시는데 방편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큰 것을 설하게 되면 이해를 못하니까 낮은 것부터 설하시는 것이다.
낮은 것부터 설해서 높은 곳으로 점차 지혜의 문에 들게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왜 순서대로 설하셨는지
먼저 우리 불자들이 알아야 한다.
이해를 해야 한다.
무조건 부처님이 설하신 ‘경은 다 똑같다’고 하는 대 망언은
무간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말이다.
사리불 오종성불이래 종종인연 종종비유 광연언교 무수방편 인도중생 영리제착
舍利佛 吾從成佛已來 種種因緣 種種譬喩 廣演言敎 無數方便 引導衆生 令離諸著
소이자하 여래 방편지견바라밀 개이구족 사리불 여래지견 광대심원 무량무애
所以者何 如來 方便知見婆羅蜜 皆已具足 舍利佛 如來知見 廣大深遠 無量無碍
역 무소외 선정 해탈 삼매 심입무제 성취일체 미증유법
力 無所畏 禪定 解脫 三昧 深入無際 成就一切 未曾有法
사리불아, 내가 성불한 이래 가지가지의 인연과 가지가지의 비유로 널리 법을 설하며,
수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든 착상을 여의게 하노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여래는 방편지견바라밀을 이미 다 구족함이라.
사리불아, 여래의 지견은 매우 넓고 커서 우주의 모든 진리를 통달하였고,
또한 깊고 멀어서 아득히 먼 과거의 일들로부터 영원한 미래의 일들까지 다 아시느니라.
또한 무량무애와 힘과 무소외와 선정 해탈 삼매에 깊이 들어 미증유법을 모두 성취
하였느니라.
이 경문만 보아도 부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셨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먼저 신해(信解)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열반경에
“신해가 원통(圓通)해야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즉 믿고 이해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믿음만 있으면 탐욕의 마음만 커지고,
이해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견만 늘어나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 수 없다.
믿음이 있어야 이해가 된다.
또 믿음만 있고 이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해를 못한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해하는 힘이 중요하다.
부처님의 지혜는 경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대 우주의 힘이라고 했다.
대 우주의 힘이 나오도록 하고자 하면 내 몸이 소우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소우주다.
바로 이 우주가 축소되어 내 몸이 된다.
그것을 알고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또 이해하는 마음이 있을 때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힘을 생기게 해야 한다.
용수보살님과 천태대사께서는
부처님의 법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고 말씀하셨다.
이 우주의 힘을 그대로 들어 내셨으니 부처님의 법 이상 넓고 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진리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의문을 가지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된다.
의문이라는 것은 의심과는 차이가 있다.
의심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면 그 문제점을 밝혀내게 된다.
과학의 발달로 의문을 가지고 깊이 들어가다 보니 거기에 따른 물리학적인 문제를
밝혀 과학이 발달하는 것이다.
모두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밝히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화두 참선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뭣고?”
로 의심하고 들어간다.
그래서
이것을 참구한다고 한다.
왜 참구라고 하느냐 하면
깊이 생각하게 되면 나중에는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그 화두를 깨친다.
화두를 풀었다는 뜻이다.
화두를 풀었다고 해도
그것은 부처님 지혜에 비하면 날아다니는 미세 먼지보다 못하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참선을 해서 화두 하나라도 깨칠 수 있느냐?
참 힘 드는 세상이다.
다만 옛날 조사들이 깨달은 것을 가지고 그 문구를 보고 깨달은 것처럼 행세(말)를
할 뿐이다.
깨달았다면 자비를 갖추어야 한다.
자비심이 나와야 된다.
진정한 자비심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서 불법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스님은
따라서 아상(我相)이 없어야 한다.
상을 내지 않는다.
금강경에도 4가지 상을 버리라고 하셨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도 버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로지 나 홀로 높다 하는 이런 마음밖에 없다.
무소유(無所有)는 어려울 것 같지만 참 쉽다.
산속에 혼자 먹고 사는데 뭐가 필요한가.
아무것도 필요 없다.
혼자 공부한다고 앉아 있으면 밥은 생기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런 것이 무소유가 아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운 상태,
나라는 자체도 없는 상태,
4가지 상 자체도 없는 상태에서 무소유가 나온다.
4가지 상을 버림으로써 무소유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아상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이 마음에서 어떻게 무소유가 나오는가.
그래서
이 말법 시대에는 정법을 설하는 자는 아주 적다는 것이다.
그냥 적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다’는 것이다.
그 대신
‘사도 외도’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시대는 ‘사견이 충만한 시대’라 했다.
참선은
의심을 하고 들어간다고 했다.
의심하는 습관이 들면 안 된다.
왜 상이 높아지느냐 하면 의심하기 때문에 상이 높아진다.
의심하지 않으면 상이 높지 않다.
참선은
단지 마음공부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음공부는 아주 얕은 것이다.
그런데
그 얕은 것을 제일 위에 올려놓는 것이 된다.
하나의 작은 가치관일 뿐이다.
즉
마음이 즐거우면 극락이다.
이런 소리 많이 하는데
마음이 즐거우면 그 자체는 극락임이 틀림없다.
내 마음이 편하면 그것이 극락이 아니라, 극락의 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하나의 작은 가치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자는 대 망언을 하는 자라고 알면 된다.
이러한
마음공부는 부처님의 뜻과는 하늘과 땅차이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우주상에 하나밖에 없다,
진리는 하나다.
그래서
의심해 들어가는 자체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신앙을 바르게 가지고자 하면 의심하는 것부터 빨리 버려야 한다.
의심을 가지고는 바른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가르침을 설해 주셨기 때문에
이 가르침이 그래서 존귀하다.
이 존귀한 가르침을 빨리 이해하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함으로 해서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고마워하지 않는다.
불자들이 좋은 일 하나 생기면
“부처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처님께서 주신 것이다.
법화경 배우는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또 중요한 것은
고마운 것을 알면 남에게 떳떳이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게 있으면 내가 이렇게 부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처럼 받을 수 있게 같이 하자 이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조급한 마음을 내면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하나를 알면 열 발 뛰어 넘으려고 한다.
그래서도 안된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다 같이 부처되자
불자들이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데 있어서
“그저 대충 빨리빨리 배우면 되지 우리가 스님 될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절에 매일 와서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스님 되려고 매일 절에 가나”
이런 소리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원하는 마음과 힘에 의해서만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법의 대자비심이 없으면 생명 있는 것은 생겨날 수 없다.
생명 있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생명이 주어져서 이렇게 나오는 것이다.
절에 간다는 것은 이러한 진리, 즉 도(道)를 깨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도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도가 아니라 불도(佛道)이다.
이 불도라는 것은
내가 부처인 것을 완전하게 깨닫는 것을 말한다.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런 식의 생각이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냥 어리석은 게 아니라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는데 있어서 조급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배우는 것이 가장 바른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내지 말고 오직 하나를 배우더라도 바르게 배워,
내 생활에 적용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자기 발전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사실은 스스로 12년 동안 난행, 고행을 하신 연후에 부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을
만 중생에게 보여주셨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12년만에 부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실천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므로 결코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불교를 공부하면서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깨달은 것처럼 행세하거나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다 섭렵한 것처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면서 불법을 아는 것처럼
사견을 내세워서는 더더욱 안 된다.
요즘은
사견을 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냥 조용하게 자기 불자들한테만 그런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데
하물며 매스컴을 타고
그런 삿된 견해를 부처님의 지혜인 것처럼 설하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경문에 다 나타내 놓으신 말씀이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실로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성문들이나 벽지불은 감히 알지도 못한다.”
라고 하셨다.
이러한 뜻을 바르게 알면
매스컴에서 어떤 사견을 이야기해도 분별해서 들을 줄 아는 지혜가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는 무조건 방편으로 인도하신다.
범부중생들에게 처음부터 진실을 설하면 알아듣지 못하므로 방편을 가지고 인도해서
아상에 집착해 있는 것을 끊어주신 다음에, 법을 점점 깊게 설해서 궁극에 진실인
일불승 법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중생들이 방편을 가지고 방편을 쓴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중생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불법으로 인도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방편)을
쓰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부적을 써주고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해서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소이자하 여래 방편지견바라밀 개이구족 사리불 여래지견 광대심원 무량무애
所以者何 如來 方便知見婆羅蜜 皆已具足 舍利佛 如來知見 廣大深遠 無量無碍
역무소외 선정 해탈 삼매 심입무제 성취일체 미증유법
力 無所畏 禪定 解脫 三昧 深入無際 成就一切 未曾有法 -
어찌하여 그러한가,
여래는 방편지견바라밀을 이미 다 구족함이라.
사리불아,
여래의 지견은 매우 넓고 커서 우주의 모든 진리를 통달하였고,
또한 깊고 멀어서 아득히 먼 과거의 일들로부터 영원한 미래의 일들까지 다 아시느니라.
또한 무량무애와 힘과 무소외와 선정 해탈 삼매에 깊이 들어 미증유법을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원문
“소위자하 여래 방편지견바라밀”이란
부처님은 방편지견바라밀을 이미 구족 하셨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은 방편지견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방편의 가르침은 대자비심에서 나온다.
대자비심의 힘, 대자비신력에서 나온다.
이것을 자비력 또는 자비신력이라고 한다.
자비신력은 마음의 힘에서 방편의 신력으로 나온다.
지견은 바라밀의 하나로 모든 사물의 진실된 성질을 구명하는 것인데,
이 구명하는 것으로써 사물을 보되 바르고 정확하게 봐야 한다.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 하나하나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지견바라밀이라 하면 삼관(三觀)이 갖추어진 것을 말한다.
삼관이란 공관(空觀), 가관(假觀), 중관(中觀)을 말하며 공, 가, 중이라고 한다.
이 공, 가, 중의 삼관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을 “지견바라밀”이라고 한다.
공관은
평등관이다.
우리 인간들은 각자 성품이 다 다르다.
또 내가 한 가지 성품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성품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행을 해서 도에 들게 되면 도를 깨달아서 성불하게 되는데 그러면 다 똑 같아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부처가 되면 다 똑 같아진다 하는 걸 가지고 일반 스님들이
“부처님이 설한경은 다 똑같다.”
라고 하는 것이다.
“경은 다 똑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이 공관이라는 반야심경의 공도리, 공사상을 가지고
“모든 경은 다 똑같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의 평등한 점을 잘 파악해서 아는 방법이 공이다.
이것이 평등관이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된다.
잘 파악해야 된다.
공관이라는 것이 평등관이라 해서 모든 것은 평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생과 부처가 같을 수가 있는가?
부처가 되어 버리면 다 똑같다.
그러나
부처가 되지 않고서는 같을 수가 없다.
평등이라는 것은
부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 똑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되면 모든 사물을 제대로 알게 된다.
누구라도 부처가 되어 버리면
모든 사물에 대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정확하게 안다.
가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들의 얼굴은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다.
눈, 코, 귀 입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나 얼굴의 모양은 다 다르다.
그 제각기 다른 면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방법이 “가관”이다.
눈은 눈이지만 다 다르다.
얼굴에 붙어 있는 것은 다 같지만 모습이 다 다르다.
이것을 정확하게 볼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은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이렇게만 보는 것은 육안으로써 보는 것이다.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인데,
부처님의 눈으로서 봐야 우리 중생의 눈, 코, 입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을 차별관(가관)이라고도 한다.
똑같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이 평등과 차별이다.
한편
모든 것이 다 평등하다고 하는 것에 집착을 하고,
차별상을 모르면 그것은 평등관을 바르게 보는 사람이 아니다.
앞에서 평등관을 이야기했지만 공사상의 의미를 가지고 보면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다 똑같다 평등하다 할 수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차별이 있다.
그런데
“다 똑같다 차별이 없다” 해버린다.
그것은 올바른 평등관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반드시 평등하지만 차별이 있다.
그런데 평등하다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그 차별을 모르면 그것은 악평등이 되어버린다.
평등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반대로
차별하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평등한 면을 모르는 것은 악차별이라고 한다.
중관이란 무엇인가?
차별이 없고 다 똑같이 평등한 것에도 차별이 생기게 되고,
여러 가지 차별이 있는 다른 모양가운데서도 평등한 면이 있다.
이것을 제대로 봤을 때는 모든 것이 통일적으로 보인다.
평등을 보고 차별을 제대로 알면 통일이 되어버린다.
이것을 통일관이라고 한다.
평등한 공이라는 것과 차별이 있는 ‘가’ 라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생각하는 것을 중관(통일관)이라 한다.
스님들 가운데 몇몇은 반야심경의 “공”사상이 최고라 한다.
따라서
“공” 사상의 대의를 나타낸 경이기 때문에 반야심경이 최고라고 한다.
이것은 평등한 것에만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은 다 똑같다고 하는 말이 된다.
지견바라밀은
공, 가, 중 삼관을 통일해서 종합해 봤을 때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은 육도를 다 가지고 있다.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여섯 가지 육도가 내 마음의 불성을 감싸고 있다.
불성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것을 미혹이라 한다.
이 미혹한 것이 중생이다.
미혹한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부처님의 경지인 최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바라밀”이다.
범부중생에서 벗어나 부처의 경계에 이르고자하면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수단과 방법(방편)이다.
범어인 바라밀을 다른 말로 하면 “도(道)”라고 한다.
산에 가면 오두막에서 수염 기르고 도 닦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여기서 도라는 것은 불도를 이야기 한다.
부처님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도를 행하는 것,
이것을 ‘도’ 라고 한다.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
즉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 이것이 ‘도’ 다.
‘도’를 또 다른 말로 하면
“건너야 할 곳을 건너기 위해서 실천한다.” 는 뜻이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중생의 경계는 이쪽 언덕인데, 저쪽 언덕인 부처님 경계로 가야 한다.
중간에 강이 하나 있는데, 건너가야 부처님 세상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일반사찰에서 천도재를 할 때 배를 만들어 물그릇에 띄우는 곳도 있고,
스님이 입적하시면 배를 크게 만들어 건너가는 흉내를 내고 한다.
사람이 건너게 해 준다고 해서 건너갈 것 같으면 이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지는 않다.
그것은 한마디로 중생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좋은 말로 이야기하면
해탈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중음신이 극락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극락에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것은 힘든 일이다.
오직 부처님의 법으로써만이 불도에 들게 할 수 있다.
배 아닌 군함을 가져다 해도 부처님 지혜에는 들 수 없다.
돈을 수 십 수천억을 들여도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부처님의 법의 힘에 의해서만이 천도가 되는 것이다.
중생이 있는 곳에서 저 쪽 부처의 경계로 가는데 그 중간이 강과 바다다.
그것이 수행이다.
중생이 수행을 해서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간다.
이것을 피안을 건넌다고 하는 것이다.
삼관에 대해서 한 번 더 요약해서 설명하면
공관은 중생이 미혹한 마음을 없애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곧 공관이라는 것이다.
가관은
마음 한 쪽에 있는 미혹한 마음을 벗어버리고 저 쪽에 있는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이 가관이다.
중관은
이 어둡고 어두운 미혹한 범부중생의 경계를 건너 깨달음을 얻은 성인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산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경문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경의 가르침을 본으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행이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경문에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놓은들
‘아 그런 것이 있구나.’
하고 생각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믿는 사람이 아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그것은 믿는 사람이 아니고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믿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바로 다 같이 부처 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방편품 제이(5-1)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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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5-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