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방편품제이⑩>
성품을 바꾸려면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몸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남에게도 전해 주고,
구원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그런 사람이 됐을 때
그 사람은 보살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이라는 사람은
남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야 하고,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열반경에서 법화경을 대수위이고 추수동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열반경 제9권 여래성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해 놓으셨다.
“중생들로 하여금 능히 불성을 봄과 같은 것은
마치 법화중에서 팔천의 성문이 수기를 받아 큰 과실을 성취함과 같다.
또한
가을에 거두어서 겨울에 창고에 가득히 간직하면 다시 지을 것이 없듯이
일천제(믿음이 없는 사람)의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모든 선한법에 대하여
다시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음이라.”
이 법화경에 들어오면 다시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의 열반경 경문에 있듯이 법화경을 대수위라 했다.
추수동장이란
‘가을에 수확을 해서 창고에 가득히 간직함과 같다’
하셨고,
열반경에 대해서는
추말동초라 이삭을 줍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 자체를 낮추신 것이 아니라 법화경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만큼
법화경은 일체 중생이 수지해야 할 가장 높고 큰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법화경 제목을 나타내신 것이다.
제목을 부르는 것은 대수위로써 불도에 들기 위한 뿌리가 되는 것이다.
불도란
부처님의 도에 드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에 드는 것이다.
불지에 들고자 하면 반드시 뿌리가 있어야 한다.
뿌리가 없이 부처님의 도에 들 수가 없다.
아함경이나 금강경이 뿌리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또,
열반경 제사권에 이 시대를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 있다.
“선남자야 내가 열반한 뒤 무량백년이 지나 네 종류의 성스러운 도인이
다시 열반하여 정법이 소멸한 뒤 상법시대의 비구들은 계율을 지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을 독송하는 자가 적다.”
네 종류의 성스러운 도인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지칭한 것이다.
진실한 성문,
진실한 연각,
진실한 보살,
부처님 이렇게 네 종류의 성인인데,
정법이 소멸한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지 않고,
자기 사견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지금으로 봐서 과연 그러하다.
달마대사가
능가경을 가지고 2조 혜가에게 전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육조에 들어서 화두선을 만들어가지고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보다 더 수승하다고
사견을 설하고 있는 자가 많지 않은가.
정법시대의 비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상법시대의 비구들은 계율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경전을 독송하는 일이 없고,
사견에 집착해 있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하셨나 하면
말법에 비구는
“기호품인 음식에 탐착하여 그 몸만을 장량하리라.
오직 자기 몸을 보신하리라”
하셨다.
“그러면서도 몸에 입은 옷은 남루하고 추악하여
그 행색은 초췌하고 위의와 공덕이 없어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옷을 반들반들 하게 잘 입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을 잘 보아야 한다.
남이 볼 때는 옷을 남루하게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남이 보았을 때는
옷도 남루하게 입고,
못 먹어서 피접이 상접해있고,
삐적 말라서 얼굴이 형편없이 불쌍하게 보일 뿐이다.
위의와 공덕이 없다는 것은
얼굴이 불쌍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마음과 겉이 다르다는 뜻이다.
마음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수행자들도 이중성격을 가진 자들이 많은데,
수행자가 아니라도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진실해야 한다.
이중성격은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므로 이중성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지난 과거에 얽매여 살게 마련이다.
지난날에 좋았던 일이나 좋지 않았던 일에만 집착하고 현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진 지난날의 금송아지 생각 때문에 현재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지금 고난에 처해져 있는데도
잘 살았던 때만을 생각 하고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책만 하고 있으니까
살아가려고 하는 의욕마져 잃고 마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가 왜 중요한가 하면 미래는 현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래가 있고,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
미래가 있다는 것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에는 인도에서 바라문교라는 종교가 있었다.
부처님도 바라문교의 스승들을 6년간에 걸쳐 만났다.
그러나
부처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6년 동안 헤매시다가 이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고,
독립하여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신 끝에 불지를 이루신 것이다.
바라문교에서 행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행하는 것과 다르다.
불자들이 자신의 고통을 스님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대체로 전생에 지은 업으로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말은 바라문교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윤회라 하는 것 자체는 바라문교에서 인정을 한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지은 업이니 받아야 된다고 바라문교에서 말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주팔자대로 살라는 것이 바라문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사주팔자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설사 전생에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지은 복이 없었다 할지라도
금생에는 어리석지 않아야한다.
가난하면 돈을 벌도록 노력을 하고,
마음이 약하면 용기가 생겨나도록 하고,
마음이 나쁘면 좋은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을 하고,
반드시 노력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대과보를 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된다고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른 법을 믿고, 실천하게 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
이것이 불교와 바라문교의 다른 점이다.
바라문교에서 윤회설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부처님도 인정을 하셨다.
그러나
윤회 자체만 인정을 해서는 안 된다.
윤회가 있으면 그 윤회를 벗어나는 가르침이 불교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2년 동안 설하신 가르침은 절반의 가르침(방편)이 되는 것이다.
절반의 가르침인 전생의 업보에 집착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바른 법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설사
사주팔자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설하신 것이다.
사주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현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바른 양심, 바른 마음을 가지고 현재에 최선을 다 할 때
미래에 좋은 보장을 받는 것이다.
전생에 지어진 업보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버려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도 중생은 그게 안 된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인데, 이 불성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육도다.
육도의 마음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이 여섯 가지 마음이 불성을 감싸고 있다.
이것을 미혹이라고 한다.
이 미혹이 부처의 마음을 감싸고 있으니까 이것을 걷어내야 하는데,
걷어내려 하지 않고 그냥 끌려 다니는 것이다.
육도에 끌려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업보도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벗어나려고 하면 경전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으로써만이 가능한데
그것을 모르니 안타깝다.
미혹한 마음을 걷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꾸 살을 찌우니 세상이 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법을 다섯 가지 탁한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부처님의 마음 또한 실로 미묘하지만 참 묘한 게 중생의 마음이다.
금방 변해서 희노애락에 집착하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법화경 공부를 바르게 하면서 법문을 듣고 실천하면
이런 중생의 성품도 바꿀 수 있다.
성품을 바꾸려면 남을 탓하지 말고, 내가 그렇다 하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성품을 고칠 수 없다.
그래야만이 불성을 감싸는 육도의 마음이 점차 벗겨지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육도의 더러운 미혹한 마음을 씻어낼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진다 해도 부처님의 법만이 오직 닦아낼 수 있다.
우리들은 아무리 좋은 선행을 해도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
보살행은 할 수 있다 해도 부처는 되지 못한다.
보살행이란
육바라밀, 보시 지게 인욕 선정 정진 지혜 이 여섯 가지를 갖추고자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는 이룰 수가 없고,
아무리 사회에서 선행을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이는 성불할 수가 없다.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
실행함으로 해서 육도의 마음을 점점 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내가 하나씩 얻어가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면
광명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피가 있고, 어떤 사람은 늦게 온다.
그것은 업이 두텁고, 얇은 차이다.
딴 사람은 조금 노력해도 좋아지는데, 나는 몇 년 됐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이 생각 자체가 두껍게 만든다.
무조건 이 법은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묘하게 업장이 벗겨진다.
다른 사람은 잘 되는데,
나는 왜 안 되나 하면 질투하는 것이 되어 자꾸 두껍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는
미래를 밝게 할 수도 있고, 어둡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바르게 행해 나가면 반드시 미래는 밝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첫째도 믿음과 실천이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믿음과 실천임을 믿고 행할 때 광명이 오지 말라 해도
반드시 온다.
부처님의 말씀은 한 치의 허망함도 없다 하는 것을 믿고 따르면 반드시 미래는
밝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무시할 권한이 없다.
남을 무시하면 내 자신도 언젠가는 무시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남의 의사를 존중하고, 남을 비아냥거리지 말고,
남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생각하고,
남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생각하고,
내가 베푼 것을 나타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천하면
내 안의 불성이 드러나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 편안한 삶을 살게된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⑪>
말과 상의적멸
“이 법은 가히 보일수가 없으니 말과 상의 적멸이라.
다른 모든 중생들은 능히 알지 못하리라.
모든 보살가운데 믿음이 견고한 자는 제하노라.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일찍이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일체의 누를 이미 다하여 이 최후신에 머무른 이 같은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리고
가령 시방이 다 사리불과 같고 다른 모든 제자가 또한 시방에 가득차서
다 함께 생각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느니라.”
부처님의 법을 말로 나타낸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말이나 글자를 가볍게 생각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말과 글자를 따르지 않고서는 수행을 할 수가 없다.
말이 없으면 수행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도 모르게 된다.
말이나 글로써 부처님의 지혜를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러나
말과 글이 아니면 부처님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말과 문자를 부정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말과 글자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 법은 보일 수가 없으며 “말과 상의 적멸”이라고 하신 것이다.
“말과 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는 뜻도 바르게 알아야 한다.
42년간 설하신 가르침은 분명 말과 문자이나.
그래서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42년 동안 설하신 것은 방편으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냥 절에 가서 절하고, 관세음보살 부르고, 천수경 읽고, 금강경 읽고,
스님들 법문하는 것 듣고, 그것이 불교라고만 알고 있다.
그것은
불교의 한쪽 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한데 여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42년간 설하신 가르침(방편)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 42년간 설하신 가르침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경문이 있다.
열반경에
“여래가 이 세상에 나오시는 문자를 수지하라.”
는 말씀이 그것이다.
여래가 나오시는 경전이 있는데
“묘법연화경이라, 이 경에서 모든 부처님이 출생하시느니라.”
열반경과 법화경의 가르침인 위의 문자는 문자로 된 문자가 아니라
‘일자 일자가 다 부처님이다.’
라는 뜻이다.
한 자 한 자가 부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래출세문자를 수지하는 것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실한 깨달음이라 함은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진실한 깨달음인 부처님의 지혜는 말과 글로써 나타낼 수가 없다.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데까지 깊이 들어가게 되니까 참된 수행이다
하는 것이다.
스님들이 머리 깎고 산속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게 수행이 아니다.
수행(修行)의 닦을 수자와 행할 행자는 내가 닦은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닦는다’는 것도 무엇을 닦는 것인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머리 깎고 가만히 앉아서 벽만 보고 앉아 있다고 닦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닦아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버리고 앉아 있는 것은 닦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불입문자 견성성불이라는 말을 가지고 수행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문자가 없으면 사람은 생활할 수가 없다.
문자가 없으면 내 뜻을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문자가 없으면 사랑도 할 수가 없다.
부모 자식 간에 연인 간에 형제자매 간에 이웃 간에 정을 나눌 수가 없다.
우주 진리의 가르침, 이것을 말씀이라고 한다.
이것을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이 우주 진리의 가르침은 오직 부처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 중생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중생과 부처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를 버리라’
고 하지만
그것은 소승 수행의 하나의 방법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아라한과에 들어서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염화미소(拈華微笑)라 해서 가섭존자처럼 부처님을 따라 웃게 된다.
꽃 한 송이, 또는 미소만으로, 부처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말이다.
아라한과 육바라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머잖아 성불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없이 웃으시는 모습만 보고도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잘못 받아들여서 부처님과 가섭존자의 마음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했다고들 한다.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은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을 가섭존자가 이해했다는 것이지
부처님의 지혜를 안다는 뜻은 아니다.
법화경 서품에서
미륵보살이 부처님이 행하시는 것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모여 있는 대중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대표해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묻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차토육서와 타방육서의 서상을 나타내신 뜻을 묻고,
문수보살이 답변하는데, 그러한 부처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뜻이지
안다는 뜻이 아니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은 그런 이치를 알게 되면,
불법이 얼마나 중요함을 알게 된다.
불자들은 이런 이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작은 것에만 집착을 하고 있다.
42년간 설하신 방편의 가르침과 권교의 대승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버리라는 뜻이다.
작은 법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일승법인 묘법연화경에 들어와야 성불한다는 말씀이다.
“말과 상(相)의 적멸(寂滅)이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으면
말과 글이 있거나 없거나 생기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명확하게 해 놓으셨다.
이 묘법연화경이 다른 경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일지라도 법화경의 가르침은 방편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문에서 “이 법은 가히 보일수가 없으니” 잘 생각하라고 하시고,
이 법은 부처님만이 아시는 법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묘법연화경에서 여래가 출세하신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화경은 “일자 일자가 진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지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했다.
하물며
아라한이나 보살과 같이 최후신에 머무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힘으로는 부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한다.
사리불과 같은 모든 제자가 합한 지혜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감히 알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벽지불의 날카로운 지혜와 번뇌가 없는 사람들이 또한 시방세계에 가득 차서
그 수가 숲과 같이 빽빽하여 모두 한 마음으로 한량없는 억겁을 두고
부처님의 참된 지혜를 알고자 할지라도 조금도 알지 못 하느니라.
새로 발심한 보살이 수없는 부처님을 공양하여 모든 뜻과 이치를 알고,
또 능히 법을 설하는 이가 숲과 같이 시방세계에 가득차서 일심묘지로써
항하사 겁을 두고 다 함께 생각할지라도, 능히 부처님의 지혜는 알지 못하느라.
항하사와 같이 많은 불퇴의 보살이 일심으로 함께 생각하여 구할지라도
또한 능히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불퇴의 보살이란
물러섬이 없는 경지인 십지(十地) 중 불퇴지의 보살경계에 든 보살이다.
우리가 불퇴의 보살이 되고자 하면 신해(信解)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열반경에서 이렇게 말씀해 놓으셨다.
“신해가 원통(圓通)해서 바야흐로 행동의 근본을 삼아야 하느니라.
믿음만 있고 이해가 없으면 탐욕하는 마음으로 무명이 증장한다.
또 이해만 있고 믿음이 없으면 사견을 증장한다.”
사견이란,
삿된 생각이 자꾸 생겨나서 제멋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신은 믿을 신이요,
해는 이해할 해다.
믿고 이해하는 마음이 하나로 통일돼야 한다는 뜻이다.
즉 말하자면
믿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진실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고 믿는 마음을 행동의 근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심은 있되 이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복으로 흐르고,
그렇게 되면 미혹한 마음이 더 생겨나게 한다.
왜냐,
기복은 자기 자신을 누에고치 속에 가두어 두는 것과 똑같이 되기 때문이다.
이웃은 필요 없고, 오직 자기 이익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근래에
법화경이 좋다는 말만 듣고 사경하는 불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성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법화경을 사경하는 그 의미도 모르고,
오직 공덕이 많다는 말만 듣고 가피를 받으려는 욕심만 가지고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경을 하니 좋은 일이 생기니까 사경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 믿는 마음만 있고, 이해가 없는 맹목적인 기복신앙이 되는 것이다.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탐욕스런 행위인 것이다.
부처님 뜻은 그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삼독(三毒)인 탐욕과 성내는 것과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라고
일찍이 가르치신 바가 있다.
법화경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그 자체가 기복이 되어 버린다.
법화경은 조금 알더라도 이해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해야 된다.
배운다는 자체가 법공양이다.
그것을 모르고, 경전만 찍어내는 것이 법공양으로 아는 불자가 의외로 많다.
한편,
묘법연화경을 믿는 마음도 없이 학문적으로만 보고,
다른 경전과 똑같다는 사견으로 방법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사견이 생각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믿
고 이해하는 마음이 같이 이루어져야만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열반경에서 유언하신 것이다.
이렇게 믿는 마음과 이해하는 마음을 함께 구족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가지고 자기 자신을 열심히 닦아나가는 이들을 두고
곧 불퇴의 보살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불퇴의 보살도 가히 부처님의 지혜는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⑫>
무시무종無始無終, 상주불멸常住不滅
또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누(漏)가 없는 불가사의한 심히 깊고 미묘한 법을
나는 이제 이미 갖추어 얻었으니 오직 나만이 이 상을 아느니라.
시방의 부처님 또한 알고 계시느니라.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마땅히 큰 믿음의 힘을 낼지니라.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에야 요긴한 진실을 설하시느니라.
모든 성문대중과 연각을 구하는 사람에게 이르노니
내가 고에 얽힘을 끊어서 속히 열반을 얻게 하노라.
부처님이 방편력을 가지고 삼승의 법으로써 가르쳐 보이시건마는
중생이 곳곳마다 집착하고 있어서 이를 이끌어 나오게 함이라.
왜
42년 동안 많은 방편의 가르침을 설하셨는가?
끝에 말씀하셨다.
“중생이 곳곳마다 집착하고 있어서 이를 이끌어 나오게 함이라.”
그래서 42년 동안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마땅히 큰 믿음을 내라.
부처님은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 진실을 설하신다.”
법화경의 뜻을 한 구절로써 다 나타내셨다.
법화경과 42년간 설하신 가르침의 관계를 다 나타내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앞에서 일념삼천(一念三千)과 십여시(十如是)에 대해서 배웠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야 하는 대문이다.
일념삼천의 법문으로 인해서 설사 지옥일지라도
부처가 될 수 있는 성선설(性善說)이 성립이 된다고 지난번에 말했다.
불계(佛界)라 하더라도 악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성악설(性惡說)이 성립이 된다 했다.
지옥에서의 성불도 가능하다는 것이고, 불계에 있더라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여시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여시로 인해서 일체 중생의 성불이 성립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함도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고, 악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성립이 된다.
십여시라는 일념삼천 십계호구(十界互具)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다 생각하지 말고, 이제 내 자신에게 이 십여시를 비추어봐야 한다.
여러분들이
각자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이 십여시를 생각해 보자.
여시상(如是相), 여러분들은 다 상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해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여시상이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如是相은 佛身으로 부처님의 모습인 몸이다.
이것을 응신 여래라 하며, 해탈이라 하고 또는 假제라고 한다.
여시성(如是性),
상이 있으면 성품이 생겨나게 된다.
성질이나 성격으로써 각자의 성품이다.
부처님입장에서는 마음(心)으로,
부처님이 갖추고 계신 대지혜와 대자비심의 심성으로
보신여래 또는 반야인 공제라 한다.
그런데
이 모습과 성품은 누구를 닮으려고 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성품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시체(如是體), 몸이다.
부처님입장에서
如是體는 身과 心 부처님의 육신인 몸과 마음으로 법신여래라 하고,
중도라 하며, 법성 또는 적멸이라고 한다.
천태대사는
삼여시인 여시상과 여시성. 여시체는 삼신(三身)으로 서로 다른 곳에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나의 신상의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사람을 두고 법화경을 깨달은 사람이라 한다.
이렇게 삼 여시를 본으로 해서, 나머지의 일곱 가지 여시가 나와서 십 여시가 되는 것이다.
여시상은 응신(應身)은 석가모니불,
여시성은 보신(報身)여래인 노사나불,
여시체는 법신(法身)으로 비로자나불인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가지고 나온 모습, 성품 몸 이것이 응신 보신 법신으로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곧 부처” 라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이 스스로 힘을 갖추고 있는 여시력(如是力)이다
우리는 모두 힘을 다 가지고 있다.
눈의 힘, 입의 힘, 귀의 힘, 목의 힘, 오장육부의 힘, 팔다리의 힘,
이런 힘이 있으니까 작용하는 것이다.
보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말하는 작용, 듣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폐가 숨을 쉬는 작용, 심장이 내뿜는 피의 작용, 생각하는 작용,
이렇게 각 기능이 작용을 한다(如是作).
작용이 있게 되면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
무엇을 짓고 나면 여시인(如是因)이 된다.
그런데
그 다음에 짓되 무엇을 지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연을 지어야 한다.
이것을 여시연(如是緣)이라고 한다.
내 몸의 힘의 작용으로 인해서 인과 연으로 여시과(如是果)가 나온다.
이 과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이 과로 인해 이익과 불이익이 생긴다.
이것이 여시보(如是報).
이렇게 여시상에서부터 여시보까지 가만히 보니 이것은 결국 하나의 마음이다.
하나의 마음, 이것이 불성인 것이다.
불성(佛性)은
부처의 성품으로서 모든 것이 다 평등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다 똑같아지며.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품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 자신의 성품을 돌아보고 좋은점과 나쁜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것을 모르면 법을 배우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쁜면은 반드시 참회를 해야 한다.
참회가 있어야 마음이 바뀐다.
참회를 하지 않으면 내 성품이 고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나쁜 성품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고친다.
성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모든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들은 십여시에서 보다시피 전생에 지어진 인연 과보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인 이 묘법연화경에 들어와서
믿음과 이치를 바르게 깨닫고, 전생에 가지고 나온 성품이 잘못되었다 하면,
그것을 바르게 보아서 바르게 깨달아 가지고, 나쁜 성품이 있으면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곧 내 업을 소멸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믿는다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내 업을 완전하게 소멸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이치를 배우고 부처님 성품을 닮아가려고 하고,
내가 잘못된 성품이 있으면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쳐짐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내가 바르게 깨달음으로 해서 나를 아는 사람들도 동참할 수 있다.
법화경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르지 않다.”
과거의 부처님,
미래의 미륵불
그리고 석가모니불의 말씀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진실한 도는 하나 뿐인 일승법만 있기 때문에,
오직 이해하고 믿음이 있어야만 큰 신력이 생기며,
신통한 힘이 생긴다는 말씀이다.
법화경을 단순하게 여타의 경과 똑같다는 말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불자들이 혼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행위가 나오기 때문에,
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비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수십억년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진리로써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을 수호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사견을 내면
무명이 증장한다고 말씀하셨다.
믿고 이해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사견이 증장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생각함으로써 불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된 것이다.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하시고,
상주불멸(常住不滅)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석가모니불은 과거 현재 미래 이 삼세에 걸쳐서 항상 존재하고 있다.
나고 멸하는 것이 없고, 영원한 생명으로서 사바세계에 상주한다는 뜻이다.
무시무종으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고 하신것이다.
이 무시무종을 사람에 비유하면 재미있다.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있는데 색은 몸이요, 심은 마음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 이 두 가지 법이 일체로서 하나라는 것이다.
이 하나인 색심(몸과 마음)이 사바세계에 영원히 상주한다.
그래서 우리 옆에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이다.
방편품에서
십여시의 가르침의 뜻으로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도 나오시고,
응신이신 석가모니불께서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시어,
한 마음속에 삼신(三身)을 갖추시고 8만 4천 법문을 남기신 것이다.
이 법화경에 들어와서야 삼신이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한 마음에 있다고 밝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을 서로 다른곳에서 찾으려고 하지마라는 것이다.
간추려보면
무시(無始)라는 것은, 구원태초로 과거형이 된다.
그러면 미래형은 무엇이냐. 무종(無終)으로, 끝도 없다.
그런데, 이 과거형과 미래형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법신, 보신, 응신이 서로 융합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의해서
상주하는 구원태초의 자수용신(自受用身)을 두고 무시무종이라 하는 것이다.
자수용신은 자수용보신여래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이렇게 거듭 성품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수용보신여래가 무시무종의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자수용신이라 하는 것은 말하자면 법화원교의 교주이다.
법화원교 법화순원의 교주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인위적인 수행 결과로 인해서 넓고 큰 법락을 수행하는 불신이다.
자수용신이 있는가 하면 타수용신이 있는데,
자수용신은
나 스스로 수행하여 마음속에 이미 보신여래인 자수용신이 갖추어져 있는 것을 말하고,
타수용신이라는 불신은 십지보살을 위해서 신력을 나타내고,
설법을 하셔서 대승경을 가지고 이 묘법연화경의 법락의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하는
별교(화엄경)의 부처님이다.
자수용신과 타수용신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인연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속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즉 본유무작삼신인 것이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삼신이 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모든 것을 한 몸에 갖추신 부처님이다.
원래부터 갖추고 있으며 단순하게 이치로서만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서의 존재를 뜻한다.
그래서
이 법을 설하는 사람은 본불 본래의 부처 자수용신의 권속으로서 본화보살이라고
하신 것이다.
종지용출품에 나오는 사대보살을 보고 본화보살이라고 하는데,
이 법을 설하는 사람은 본래의 부처인,
자수용보신여래의 권속으로 본화보살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본화보살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⑬〉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에야 요긴한 진실을 설한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마땅히 큰 믿음의 힘을 낼지니라.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에야 요긴한 진실을 설하시느니라.
모든 성문 대중과 연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내가 고에 얽힘을 끌러서 속히 열반을 얻게 하노라.
부처님이 방편력을 가지고 삼승의 법으로써 가르쳐 보이시건마는
중생이 곳곳마다 집착하고 있어서 이를 이끌어 나오게 함이라.
이미 무량의경에서 밝히셨지마는 여기서
“모든 부처님 말씀이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이 설하신 법에 마땅히 믿음의 힘을 내라.
세존은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에야 요긴한 진실을 설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이 42년간 모든 법을 설하신 후에 진실한 법을 설하신다는 것을
다시 밝히신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부처님께서 부처가 되신 후에 처음에는 방편의 가르침으로써 듣는 사람에 따라서
그들에게 맞는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다음에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실을 설하신다는
뜻이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편으로 설했고,
이제는 때가 되어서 진실을 나타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성문대중과 연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내가 고에 얽힘을 끌러서 속히 열반을 얻게 하노라.”
세상의 도리를 듣고 무상함을 느낀다.
즉 말하자면
세상 살아가는 게 무상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상이 없는 세상인데 한마디로 고에 얽혀서, 번뇌에 얽혀서, 집착에 빠져서,
자기에게 빠져서 헤매고 있다는 말씀이다.
출가를 해서 세속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성문연각이다.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지금까지는 소승이라는 낮은 가르침을 설해서 말씀해 놓으셨다.
고의 얽힘을 끌러서 열반을 얻게 한 것이다.
이렇게 고뇌란
번뇌로서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으로
누에처럼 자기가 고치라는 집을 지어 그 속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필경에는 번데기가 되고 마는것과 같이 중생들도 번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않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해탈법을 통해 열반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하지만
성문연각의 열반은 참된 열반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 깊이, 그야말로 참된 해탈을 구해야한다.
그것을 증득하려면 더 깊은 깨달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오랫동안 법을 설하신 후 요긴한 진실을 설한다’
고 한 것은 42년 동안 방편을 설하신 것을 전부 버리란 말씀인 것이다.
말하자면 타박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고자 하시는데 의문을 품게 되고,
또 거기다가 지금까지 설한 것은 방편이라고 하시니까,
그 회중에 있던 대중들이 42년 동안 굳게 믿어왔는데, 진짜 해탈을 얻었다고
믿어왔는데 가짜라고 하니까 의문이 생긴것이다.
그러면 왜 42년 동안에 그 많은 말씀을 하셨을까?
부처님이
“방편력을 가지고 삼승의 법으로써 가르쳐 보이시건마는
중생이 곳곳마다 집착하고 있어서 이를 이끌어 나오게 함이라”
성문의 경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성문에 집착하고,
연각의 경계에 안주하는 사람은 연각에 집착하고,
보살의 경계에 집착하는 사람은 보살법에 집착하기 때문에
거기서 이끌어 나오게 한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깨달음이 아니므로 삼승법의 경계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그 때 대중 가운데 모든 성문, 누가 다한 아라한, 아야교진여 등 일천이백인과
성문 벽지불심을 발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는 각각 이 생각을 하되,
지금 세존께서 무슨 연고로 은근히 방편을 칭탄하시어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가.
부처님이 얻으신 법은 심히 깊고 깨닫기 어려우며,
설하신 뜻은 알기 어려워 일체의 성문 벽지불은 능히 미칠 수 없다 하시는고.
부처님이 일 해탈의 법을 설하시어 우리들도 또한 이 법을 얻어 열반에 이르렀거늘 지금 이 말씀의 뜻을 알 수 없도다.
“우리들도 또한 이법을 얻어서 열반에 이르거늘”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얻은 열반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도무지 모르겠다’ 대중들이 이런 의심을 한 것이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간다.
지금까지는 방편을 아주 칭찬하시고, 찬탄을 하시더니
이제와서 그것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시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자기 자신은 다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실한 열반이 아니라고 하시니
대중들이 놀라고 의심스럽고 참 답답할 노릇이라는. 그런 뜻이다.
지금 진실의 가르침이 하나하나 들어나기 시작한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실로 깊어서 깨닫기 어렵다.
부처님이 설하신 뜻은 도저히 모르겠다.
그 의문들을 앞으로 부처님께서 스스로 밝히시게 된다.
그 때 사리불이 사중의 의심함을 알고 자신도 또한 알지 못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이며 무슨 인연으로 모든 부처님의 가장 큰 방편과 심히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법을 거듭 칭탄하시나이까.
저는 예로부터 일찍이 부처님을 따라 이와 같은 말씀을 듣지 못하였나이다.
지금 사중이 다함께 의심하오니 오직 원컨대 세존께서는 이 일을 설하시옵소서.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심히 깊고 미묘하여 알기 어려운 법을 거듭 칭탄하시나이까.
대중들이 의심들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
근기가 가장 수승하고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리불존자가 자기 자신도 모르겠으니
부처님께 대중을 대신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해 주실것을
부처님께 간청을 하게 된다.
사리불이 세 번을 간절히 요청하는데 이것을 삼지삼청이라고 한다.
그 때 사리불이 거듭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드리되
태양 같은 밝은 지혜 거룩하신 세존께서 오랜 후에 이 법을 설하시되,
스스로 이 같은 열 가지 힘과 네 가지의 두려움이 전혀 없는 무소외와
깊은 삼매, 적멸, 선정, 해탈 등 불가사의의 크신 법을 얻었다 하시며,
도량에서 얻은 법은 능히 물으려 하는 자도 없고,
내 뜻은 측량하기 어려워 또한 능히 물을 자도 없으리라 하시며,
묻지 아니하였건만 스스로 설하시되,
행하신 도를 칭탄하시고, 지혜는 심히 미묘하여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라 하시니,
번뇌가 없는 모든 나한과 열반을 구하는 자는 지금 모두 의심을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이 같이 설하시나이까.
연각을 구하는 비구 비구니와 모든 하늘 용 귀신과 건달바 등이 서로 보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부처님을 우러러보고 있사오니 이 일이 어찌 됨이오니까.
원컨대 부처님께서 해설하여 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모든 성문 대중에게 저를 제일이라 하시었으나,
저는 지금 스스로의 지혜로는 의혹하여 알 수 없나이다.
이것이 구경법이 되나이까. 이것이 행할 도가 되나이까.
부처님의 가르치심에서 나온 불자는 합장하고 우러러 기다리오니,
원컨대 미묘한 음성을 내시어 이 때에 진실을 설하시옵소서.
모든 하늘·용·신의 무리는 그 수가 항하사와 같으며,
성불하려는 모든 보살의 수는 팔만이나 되오며,
또는 만억 나라의 모든 전륜성왕이 와서 합장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족한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아서라, 그만두라. 더 말하지 말라.
만약 이 일을 설하면 일체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이 다 놀라고 의심하리라.
사리불이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오직 원컨대 설하시옵소서.
오직 원컨대 설해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그런고 하오면,
이 회에 모인 수없는 백천만억 아승지의 중생은 일찍이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여
모든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명료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심을 들으면 곧 능히
공경하고 믿으오리이다.
그 때 사리불이 거듭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드리되,
법왕무상존이시여,
원컨대 오직 설하시고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이 회의 한량없는 대중은 능히 공경하여 믿을 자만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거듭 말리시며,
사리불아, 만약 이 일을 설하면 일체의 세간과 하늘·사람·아수라는
다 놀라고 의심할 것이며, 거만한 비구는 장차 지옥에 떨어지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시되,
아서라, 그만두라. 더 말하지 말라.
나의 법은 묘하여 생각하기 어려우니 모든 거만한 자들이 들으면
반드시 공경하지 않고, 믿지 않느니라.
그 때 사리불이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오직 원컨대 설하시옵소서.
오직 원컨대 설해 주시옵소서.
지금 이 회중의 저와 같은 비구 무리 백천만억은 세세에 이미 일찍이
부처님의 교화를 받았사오니, 이같은 사람들은 반드시 공경하고 믿어서
기나긴 세월을 안온하며 요익되게 함이 많으오리이다.
여기서 밝히신 건대
부처님께서 사리불존자가 다시 한 번 간청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서라, 그만두라. 더 말하지 말라.
만약 이 일을 설하면 일체 세간의 모든 하늘과 사람이 다 놀라고 의심하리라.”
너도 알아듣지 못한다.
말해 주어 봤자 괜히 의심만 하고,
돌아서면 빈정거리기나 하고 욕이나 하여 구업을 지을 것이라
이 법을 서슴없이 설하기가 머뭇거려진다는 뜻이다.
대중들의 마음을 부처님은 다 알고 계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야기한들 대중이 믿겠느냐.
좋다고 하니까 기복적인 마음만 가지고 참된 진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거만한 비구는 장차 지옥에 떨어지리라” 하셨다.
거참 무서운 이야기이다.
중국 양나라 때 법운법사는 화엄경의 대가라고 한다.
그러나 때로는 법화경을 설할 때도 있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엄경을 설할때는 그러한 이적이 없었다고 한다.
화엄경을 제일로 하고
열반경을 제2로 하고
법화경을 제3으로 세웠으니
천태대사가 법운은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일갈하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뜻과는 달리 법화경을 제1로 삼지않고
화엄경을 제1로 삼은것은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는 뜻이다.
요즈음
법화경이 좋다 하니까 우리나라에서 불자들이 사경을 제일 많이 한다.
몇년전만 해도 금강경 사경을 제일 많이 했는데 법화경을 많이 한다.
그것은
공덕이 제일 많다고 하니까, 복을 많이 갖다 준다 하니까.
법화경 사경을 많이 하고 있다.
사경하는 불자 가운데 40%이상이 법화경 사경을 한다.
금강경은 20%밖에 안 된다.
가면 갈수록 법화경 사경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왜냐,
공덕이 많고, 실제로 사경을 하니까 이익이 되고, 좋은 일이 생기니까.
알거나 모르거나 쓰니까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법화경을 가까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결코 이 법화경을 의심하거나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을 비방하거나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불교를 믿고자 하면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실천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구.의. 삼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 구업 짓지 말고,
몸으로 업을 짓지 말고,
마음으로 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 놀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설하기가 힘 든다.
법화경을 의심하거나 거만하고 교만한 비구들은 장차 지옥에 떨어진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시고 계신다.
그 때 사리불이 거듭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드리되,
무상양족존이시여,
원컨대 가장 높은 법을 설해 주시옵소서.
저는 부처님의 장자이오니 오직 분별하여 설해 주시옵소서.
이 회의 한량없는 대중은 능히 이 법을 공경하고 믿으오리이다.
부처님께서 이미 일찍이 세세에 이 같은 무리들을 교화하셨나이다.
다 일심으로 합장하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받들어 가지려 하나이다.
저희들 천이백 나한과 그 밖에 불도를 구하는 자,
원컨대 이 대중을 위해 오직 분별하여 설해 주시옵소서.
이들이 이 법을 들으면 환희심을 크게 낼 것이옵나이다.
사리불은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는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도록 설해주시기를 간곡하게 청하는 것이다.
회중에 대중들은 각자가 얻은 경계가 최고로 알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열반에 대해서 설해주신다면 듣고 기뻐할 것이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미 성심으로 세 번이나 청하니 어찌 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고 생각하라.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이 말씀을 하실 때,
회중에 있던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오천 인 등이 곧 자리로부터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물러감이라.
어찌하여 그런고 하면,
이 무리는 죄근이 깊고 무거우며 거만하여 아직 얻지 못함을 얻었다 이르며,
아직 증득치 못함을 증득하였다 이름이라.
이러한 허물이 있어 이에 머무를 수 없었느니라.
세존께서 묵연하사 제지하지 않으심이라.
부처님께서 사리불 너를 위해서 설하리라 말씀하셨다.
너는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라.
너를 위해 설하겠다는 이유가 있다.
이 회중에 있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오천 인이 그 때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배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부처님께서 설하시지 않은 것은 그 자들 때문이고,
사리불 너에게만 설하겠다는 것도 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오천인 때문에
바로 사리불 너를 위해 이 법을 설해주겠노라 하신 것이다.
왜냐,
그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높은 법을 듣고도 의심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로
장차 무간지옥을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죄근이 깊다.
즉 죄의 뿌리가 깊어서 죄가 무겁고 업장이 두꺼워서 아직 얻지도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자기가 해탈하지 못하고서도 해탈했다 생각하고,
열반에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은
‘들어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너에게 이 법을 설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오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가엽고 불쌍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속에 앉아 법을 듣게 되면 반드시 그들은 믿지 않고 받아 가지지 않는다.
그렇게 됨으로 해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설하지도 못하시고, 저들이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사리불 너를 위해서 설하겠다 하신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물러난 것은 죄근이 깊어서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교만하고 상이 높아서 결국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허물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다.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자기의 심성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자기 허물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높은 법을 설하시고자 함에도
물러간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들이 물러가도 잡지 않으셨다.
잡아봐야 그 자들은 상이 높아서 부처님 법을 듣고 믿지 않고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무간지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⑭>
일대사인연 一大事因緣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나의 지금 이 대중은 가지나 잎은 없고 오직 정실 순수한 열매만 남아 있음이라.
사리불아, 이 같이 거만한 자는 물러감도 좋으니라.
너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사리불이 말씀하되 예 그러하옵니까?
세존이시여, 원컨대 즐거이 듣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묘한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때를 당하여 이를 설하시나니 우담바라 꽃이
때에 한번 피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불아, 너희들은 마땅히 믿을지니라.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은 진실이요, 허망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참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지금 오천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는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하시기 직전에 물러났다.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고, 깨닫지도 못 한 것을 깨달았다 생각하는 자들이다.
나는 이미 열반에 들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더 이상 부처님으로 부터 들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물러 난 것이다.
법화경 설법을 듣고자 남아있는 사람들을 부처님께서
‘순수 정실의 열매’라고 하셨다.
정말 진실하고 조금도 소홀하지 않으면서 듣고자 하는 사람,
말하자면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 설하시는데 건성으로 듣지 않는 사람들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순수 정실의 열매만 남아있다고 하신 것이다.
‘사리불아 이렇게 거만한 자는 물러나도 좋으니라.’
스스로 깨달아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물러나는 것이 좋다.
왜냐
이들이 앉아있어 봐야 의심하고, 믿지도 않고,
결국 그들이 법화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비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죄과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자비심이 많기 때문에 그들이 무간지옥에 들어가 고통 받는 것을
어찌 볼 수 있겠나.
그래서 그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를 위해,
‘사리불아 너는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해서 설하리라.’
하신 것이다.
왜 사리불을 위해 설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사리불존자는 근기가 수승한 십대제자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리불에게 설하시는 것이다.
단 사리불에게 설하신다하여 사리불만 들으라는 것은 아니다.
사리불은 지혜롭고 겸손한 자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승인 성문과 연각들에게 해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리불존자가
‘예 그러하옵니까? 세존이시여, 즐겁게 설법을 듣고자 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같이 묘한 법은 때를 당해야 이를 설하신다.’하셨다.
이 법은 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설할 수가 없다는 뚜렷한 증문이 있다.
용수보살은 부처님 입멸 700년 후에 나오신 분인데
부처님께서 예언을 해놓으셨다.
‘700년 뒤에 선인이 나오리라. 그가 법을 전하리라.’
그 용수보살이 부처님의 예언대로 나와 ‘대지도론’을 폈다.
그 지도론을 보면
흑문과 백문이라는 말씀을 해놓으셨다.
흑문은 일체 42년의 방편의 경이고, 백문은 일불승인 법화경이다.
용수보살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문인 묘법연화경을 설하지 않았다.
다만
대지도론에 보면 법화경에 대한 가르침을 인용해서 법을 많이 설해놓았다.
때가 되지 않아서 자세히 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몰라서 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여기 방편품 경문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때가 되어야 이 법은 설한다고 하셨다.
우담바라 꽃이 한번 피는 것과 같다.
우담바라 꽃은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꽃이다.
그와 같이
이 법은 듣기도, 믿기도, 들어가기도, 또한 펴기도 힘들다는 뜻이다.
한 번 듣는 것조차도 우담바라 꽃이 한 번 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얼마나 귀하고 귀한 법인가.
그래서
때가 되어서 이를 설한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찬탄하시는 뜻과,
이 법은 함부로 마음대로 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놓으신 것이다.
이 법은 함부로 멋대로 설하고 싶다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설하는 법이 아니다.
그래서
용수보살도 대지도론에 인용만 했을 뿐, 법화경을 설하지는 않은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질실하고 허망한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사십여 년 동안 방편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은
이 진실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들어낸 것이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시나니 어찌하여 그러한고,
내가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의 말로써 모든 법을 설함이니라.
이 법은 능히 생각해서 분별하기가 어려우니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능히 이를 알게 하시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고.
모든 부처님께서 오직 일대사의 인연으로 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어찌하여 모든 부처님 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하여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는고.
모든 부처님 세존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주사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 지혜를 보여 주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과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게 하시려고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하여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함이니라.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이르시되,
모든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시느니라.
모든 여러 가지의 소작이 있음은 항상 이 한 가지 일을 위하심이라.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써 중생에게 보이며 깨우치도록 하심이라.
사리불아,
여래는 다만 일불승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다른 법은 없거늘,
어찌 이승이 있고, 삼승이 있겠느냐.
사리불아,
일체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
부처님께서 실로 중요하고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뜻을 밝히신 것이다.
첫머리에는
질문하고 대답하시고 이런 식으로 그들을 위해서 법을 설하셨다.
묻는 사람들을 위해서 법을 설하셨다.
이제부터는
묻지 않는데 부처님 스스로 설하신 것이다.
이것을 무문자설[無問自說]이라고 한다.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의 비유로 모든 법을 설하시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방편을 여시는 것이다.
그 다음에
모든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밝히신다.
‘일대사인연’ 이란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온 뜻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일대사라는 자체가 중요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한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바르고 바르지 않은가를 명확하게 분별해서 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일대사인 것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이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회에서는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사람답게 사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은 그런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보람이 있는가.
여기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불법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바른 삶을 위해서 8만4천 법문을 설하셨지만,
법화경을 설하시기 전의 법문은 법화경으로 중생들을 이끌어 들이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여기서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신 근본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대사의 가르침인 일불승을 가르치기 위해서 나오신 것이라고 밝히신 것이
‘일대사인연’이란 말씀이다.
중생이 바로 목적해야 할 그 근본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게 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쉽게 포기해 버리니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게 되고
‘일대사인연’을 밝히신 것이다.
‘일대사인연’에서 ‘일’은 일불승을 말하는 것이고,
일불승은 곧 묘법연화경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다만 일불승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다.’
고 하셨다.
‘어찌 이승이 있고, 삼승이 있겠느냐.’
다른 법은 없다.
일불승밖에 없다.
따라서 일불승의 ‘일’은 묘법연화경을 뜻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은 팔만법장이 있다.
그러나
팔만법장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를 설하셨지만 전부 다른 것이 아니라 전부가 하나라는 것이다.
이 하나가 ‘대’라는 것이다.
하나에 팔만법장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대’라는 것이다.
이 하나인 묘법연화경에서 모든 법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묘법연화경도 다른 방편경과 ‘똑 같다’고 하는 스님들이 많다.
그것은 잘못된 사견임을 알아야 한다.
법화경은 다른 경과 동등한 것이 아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일불승인 법화경에서 나온 것이다.
일대사에서 ‘사’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오시고 열반하시는데 대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태자로 태어나시고, 태자로 태어나서 성장하시고,
성장을 해서 궁성을 나와 출가를 하시고,
바른 수행으로 인해 득도를 하시고,
득도를 하시어 설법을 하시고,
설법을 하시고 나서 열반에 드시는 의식,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일대사 인연’의 ‘인’은
모든 중생들이 본래부처, 불성이라는 종자 이것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인’이라고 한다.
‘연’은 모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시게 되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하셔서 감응이 되게 해서 나타나는 것, 이것을 ‘연’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이라고 한다.
좋은 인연을 지어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좋은 인연이 될 수 없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본래 뜻은 가장 큰 ‘인연’이 되는 것이다.
이 인연을 맺어서 실천해 가는 것이 그야말로 중생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라는 존재는 두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는 중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받아 나오셔서 부처님이 되는 과정을
보이시고, 42년 동안 방편의 가르침을 설하시게 된다.
마지막에 십지보살을 위해 설하신 것이 타수용신이라는 것이다.
이 타수용신은 곧 사람으로서의 부처님이 십지 보살을 위해 법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법화경을 설하신 것은 사람 몸으로 부처되신 분이 설하신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구원본불인 자수용보신여래가 설하신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신 것은 절대적인 신으로 설하신 것이지
사람으로 설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능생(能生)이라고 한다.
능인(能仁)은 사람 몸으로 오신 석가모니부처님을 뜻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을 나오게 하신 것은 능생이다.
이 능생은 바로 묘법연화경이다.
일불승이다.
일불승은 신령스럽다.
신령스럽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절대적인 유일신으로, 우주 삼라만상 삼천대천세계를 창조하신
부처님이시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천국에 머문다고 했으니 사바세계를 관장하는 제석천왕의 자리라고
보아진다.
하늘에는 33가지 나라가 있다.
천국은
그 중의 한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33왕 중의 한 분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왕중의 왕, 즉 33천을 관장하신다 하셨다.
뿐만 아니라
우주전체와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와 시방삼세를 부처님이 두셨다고 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의 종자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자만 가지고 있다고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
그 부처의 종자가 싹이 나도록해서 잘 거두어야,
비로소 싹이 성장하여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불성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이다.
불성을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하나밖에 없는 진실한 법밖에 없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회의 가치관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물질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다보니 사회가 어지럽고,
유사 이래 일찍이 누려보지 못한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못 느끼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불성이 마음의 핵이란 사실이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불성을 감싸고 있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은 생각에서 나오는데 이 생각에서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 천)가
만들어진다.
이 육도가 불성을 감싸고 있어 불성이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부처님의 지혜에 들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만들어 내는 육도 때문에, 불성을 끄집어내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미혹 속에서 헤매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나오셔서 개시오입(開示悟入)하신 것이다.
개시오입은
부처님께서 법을 열어서, 법을 배워서, 법을 닦게 해서, 법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개시오입은 네 가지로 설하셨지만 궁극에는 하나가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관으로 닦으면 법문(法門)이 열린다 했다.
그 다음에는
법문을 통해서 지혜가 이루어지고, 지혜가 이루어지게 되면 계위를 성취하게 된다.
부처님이 되고자하는 수행계위인 오십이위가 화엄경에 설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는 하나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견도 하나다.
부처님의 지혜도 하나다.
그래서
진리가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우주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리라는
가치관을 설정해야 한다.
이것이 곧 불교이고, 법화경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생각한다.
또 중생들의 즐거움이 곧 부처님 자신의 즐거움으로 생각하신다.
그러니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과 어떤 관계가 되는가.
유기적 공존이 된다.
부처님이 없으면 중생이 없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이것은 필연적 공존으로서 유기적 공존이 되는 이치다.
부처님과 내가 궁극에는 하나가 된다.
그때는
필연적 공존이 되지만 지금의 중생과 부처님으로서는 유기적 공존이 된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를 내 가치관으로 설정을 해서
살아가면,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악한 마음을 자꾸 버리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지 아니하고서는 자기 이익에만 급급하게 되고,
오직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회를 점점 어둡게 만드는 것이고,
악의 다툼밖에 없는 그런 하나의 장소밖에 안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보여주셨듯이, 우리는 부처가 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고 하지 않고,
이생의 막을 내린다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⑮>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심에 있어서 실로
“이 법이 묘하다”
하신 것을 천태대사께서 법화현의에다가 밝혀 놓으신 말씀이 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신 것은
결국 여러 가지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가르침은 하나밖에 없다.
그 하나가 바로 진리요 진실이라는 것을 묘법연화경에 드러내신 것이다.
열 가지의 아주 묘함이 있다고 설하신 가르침이다.
“이 법은 능히 생각해서 분별하기 어렵다”
이 말씀은
우주상의 모든 이치 즉, 진리는 하나라는 뜻으로 이것이 묘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전의 이치가 실로 묘하다 해서 이것을 경묘(經妙)라고 한다.
“오직 모든 부처님만이 능히 이를 알게 하시느니라.”
부처님만이 능히 이를 안다 하신 것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가 묘하다는 뜻이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는 보살도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는 실로 묘하다.
그래서
지혜의 묘가 있다해서 지묘(知妙)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일(一)은 하나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법신이다.
대(大)는 부처님의 큰 지혜로. 이것을 반야라고도 한다.
사(事)는 수행으로 해탈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일(一)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팔만사천법문이지만
그것은 하나인 묘법연화경을 위해서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 하는 것이
곧 묘법연화경이라는 뜻이다.
대는
부처님의 하나밖에 없는 큰 지혜인 묘법연화경이다.
사(事)는
수행인데, 바로 묘법연화경으로써 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행도 하나인 묘법연화경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대사라 함은 수행이 하나라는 뜻이다.
이 수행은 행이기 때문에 묘법연화경을 수지해서 행하므로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행이 실로 묘하다고 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열심히 하게 되면 스스로가 묘함을 느끼게 된다.
건성으로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이 법화경에 대한 뜻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게 되면
실로 묘함을 스스로 알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수행이 묘하다해서 행묘(行妙)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행인 일대사라 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다.
하나는 법화경의 제목을 수지하는 것이 묘하다고 해서 행묘라는 것이 되고,
다른 하나는 삼법묘(三法妙)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은 법신이요,
대는 반야요,
사는 해탈이라 했다.
이 세 가지 법이 묘하다 해서 삼법묘인 것이다.
결국 이 세 법이 곧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네 번째.
“부처님 세존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 주시어
청정함을 얻게 한다.”
이것은
지견인데 부처님의 지견은 개시오입에 있다 했다.
개시오입(開示悟入)을 사불지견(四佛知見)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개시오입케 한 것이다.
화엄경에서
설한 52위 중에서 사십위까지 계위가 하나기 때문에 실로 묘하다고 하는데
이것을 계묘(界妙)라 한다.
이것은
사십위까지는 계를 지키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세상에 출현하셨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중생들에게 감응을 주기 위함이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주는 감응은 두 개 세 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중생들에게 감응하시는 것도 하나다.
중생들이 정말 바른 믿음을 가지고 수행을 했을 때
부처님께서 감응을 하심으로 해서 중생들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이것이 감응묘(感應妙)라고 한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보살을 교화하신다.”
보살을 교화하신다 하는 것은 권속이 하나라는 뜻이다.
모든 중생들은 인연에 따라 보살의 권속(식구)이 된다.
권속이 하나라는 것은 중생도 하나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이 보살의 권속이라는 것이 묘하다고 해서
권속묘(眷屬妙)라고 한다.
“모든 여러 가지 소작(所作)이 있으나 항상 이 한 가지 일을 위하심이다.”
라고 했다.
여러 가지 소작이 있다 하는 것은 신통을 나타낸 것인데 이 신통도 하나라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모든 신통이 하나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 하나는 법화경을 의미하는데 모든 신통도 법화경에서 나온다.
그래서 신통도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통이 실로 묘하다는 것이다.
신통은 천안통에서 숙명통까지 여섯 가지 신통이 있다.
이 육신통의 신통력도 하나인 법화경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법화경이 아니면 신통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신통묘(神通妙)라고 한다.
“부처님의 지혜로써 중생에게 보이며 깨우치도록 하신다.”
중생이 깨닫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해서이고,
이 깨닫게 되는 것도 중생이 이익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익도 나라는 뜻이지 이것저것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원래
이익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어야 된다.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이익도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그마한 낮은 걸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깨우치는 것이다.
불도를 깨우치는 데는 하나밖에 없다.
불도를 깨우치는 데는 오직 묘법연화경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하나로 인해서 생기기 때문에 이익이 묘하다고 해서 이익묘(利益妙)라고 한다.
“다만 일불승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신다.”
일불승은 법화원교이다.
법화순원의 원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 법화경 설법은 실로 묘하다.
그래서 설법묘(說法妙)라고 하는데, 이 설법도 또한 하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최고의 깨달음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이듯이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하나지 둘이 아니다.
이 부처님은 저것 깨닫고, 저 부처님은 저것 깨닫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오직 하나인 우주삼라만상의 하나밖에 없는 진리를 완벽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 하나 속에 만법이 들어있다.
그래서 설법이 하나요, 실로 그 설법이 묘함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법화경의 묘한 것 열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다섯 가지를
특히 진실설이라 한다.
“제불세존 욕령중생 개불지견(諸佛世尊欲令衆生開佛知見)”
이라 했는데
‘욕’은 바로 부처님을 지칭한 것이고,
“출현어세(出現於世)” 세상에 출현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은
감응이 하나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면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게 되는데 설법을 하고 나면
중생들이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믿고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다”는 것이다.
감응이 하나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
“단교화보살(但敎化菩薩)” 다만 보살을 교화하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권속이 하나라는 뜻이다.
“제유소작 상위일사(“諸有所作 常爲一事)”
모든 여러 가지 소작이 있으면 항상 이 한 가지를 위함이다.
이 한 가지를 위한다는 것은 바로 육신통이 하나라는 것을 나타낸 뜻이다.
“유이불지지견 시오중생(唯以佛之知見示悟衆生)”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써 중생에게 보이고 깨우치도록 하신다는 것으로
이익이 하나라는 뜻이다.
이 다섯 가지가 ‘진실설’이다.
사리불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셨으니,
이 법도 다 일불승을 위한 까닭이니라.
이 모든 중생이 모든 부처님을 쫓아 법을 받들어 듣고는
마침내 최고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얻느니라.
사리불아,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마땅히 세상에 출현하시어
또한 한량없고 수없는 방편과 가지가지의 인연과 비유의 말씀으로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시려니와, 이 법도 다 일불승을 위하는 까닭이니라.
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을 좇아 법을 받들어 듣고 마침내 다 일체종지를 얻느니라.
“시법개위일불승고(是法皆爲一佛乘故)”
이 법도 다 일불승을 위한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방편력으로 42년 동안에
화엄경과 더불어 아함경, 방등십이부경, 대반야경을 설하셨다.
이것이
모두가 다 일불승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심법은 과거 부처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래에 오실 미륵 부처님이 모두 다 똑같다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은 하나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 수시로 기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곧 부처님의 설법으로 진리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변함이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의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장생하기 위해서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했지만
결국 불로장생하는 약초를 구하지 못했다.
구할 수가 없다.
이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 생명은 바로 불성이다.
이 불성은 영원한 것이다.
부처의 성품, 이것을 끄집어내면 육신은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수행과 공부를 하는 것이다.
생각이 마음을 만든다.
생각이 마음을 만드는데, 마음 가운데 불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무엇인가 물어보면 마음을 닦는 공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음을 왜 닦는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수가 많다.
다만
마음만 닦아지기를 바란다.
마음을 어떻게 닦느냐가 중요하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른다고 해서 마음이 닦아지는가 아니면 화두를 든다고 해서
마음이 닦아지는가 결코 닦아지지 않을 것이다.
불성을 감싸고 있는 이 마음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성문. 연각. 보살. 불계로서
그 중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계가 육도다.
육도의 마음을 씻어내는 것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인 일불승이 아니고는 마음을 닦을 방법이 없다.
그것을 깨달아 알게 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바로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부처님을 쫓아 법을 받들고,
듣고, 마침내 다 ‘일체종지’를 얻게 된다.
“법을 받들어 듣는다.” 듣는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들어도 바로 들어야지 바로 듣지 못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 상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금강경을 많이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된 것이 상이 높아져 버린다.
금강경 많이 했다는 사람 중에 금강경이 최고인 줄 알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금강경의 근본 뜻인 상을 버리라는 부처님 뜻은 어디 가고,
내가 오래동안 많이 했다 하는 이것만 가지고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집착도 버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바르게 듣지 않고 잘못듣고 엉뚱하게 멋대로 해석하게 되면
사견이 나와 바른 수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듣는것이 중요한 것이다.
바르게 들었을 때
마침내 일체종지인 부처님의 일체 모든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가 밥을 주나 돈을 주나하는 어리석은 자들도 참으로 많은 것이
현실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방편품 제이(5-3)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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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연화경(묘법연화경) 방편품 제이(5-4)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