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동광큰스님(실상연화종 현광사)/석동광스님 묘법연화경 법문(현광사)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묘일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원행화 2020. 2. 3. 20:36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①> 

인간 몸 받았을 때 반드시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무량의경 설법품

묘법연화경다른 경과의 승열(勝劣)을 나타내신 이다.

법화경 이전의 은 모두 방편으로 하신 것이고,

묘법연화경유일한 진실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대장엄보살팔만보살을 대표해서 부처님

‘어떤 법문을 알아야 부처님지혜(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를 얻을 수 있나이까?’

하고 여쭙는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부처님지혜보다 등각계위이다.

보살부처님경지에 오르는 것을 등각(等覺)이라 하고,

다시 한 단계 더 오른 묘각(妙覺)에 가야 부처님지혜를 얻는다.

 

“선남자 시일법문 명위- 무량의. 보살 욕득수학- 무량의 응당관찰-

일체제법 자본래금 성상공적 무대무소 무생무멸 비주비동 부진불퇴

유여허공 무유이법

(善男子 是一法門 名爲- 無量義. 菩薩 欲得修學- 無量義 應當觀察-

一切諸法 自本來今 性相空寂 無大無小 無生無滅  非住非動 不進不退

猶如虛空 無有二法)

선남자야, 이 법문의 이름은 무량의경이라 하느니라.

보살이 무량의를 닦고 배워서 얻고자 하면 마땅히 모든 법은 본래부터 지금까지 성품과 형상이 공적하여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으며,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으며, 머무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아니하며,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 두 가지의 법이 없음을 관찰할지니라.”  


‘하나 (일불승)’이라는 것

부처님지혜말씀하신 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은 능히 보살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룩하여 얻게 한다.

 

그 하나의 법문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량의경닦고 배워야 한다 이다.


무량의경닦고, 알고 행함으로

법화경(일불승)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제법은 본래 성품형상공적하다.

공(空)차별초월하고,

적(寂)변화되는 것을 초월함을 말한다.


우리가 생명을 받을 때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변한다.

모든 생명체싹이 틈과 동시에 변하고 있으나 변하는 것조차 초월하는 것이 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 모든 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형상(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지만

근원에서 보면 차별이 없고, 무상(無常)하여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변하는 것 같지만 역시 근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본질적으로는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남녀평등하다 함은 이 으로 인한 평등함이다.


조선시대는

유교발전으로 인해 남녀 불평등심화된 사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권을 생각하기 때문에 남녀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평등을 말하고 있다.


오리려

요즈음은 여성상위로 역차별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가르침처럼 모든 사물평등하지 않다면 남녀평등의미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평등하다.

잘 나고 못난 것이 없다.


중생들이

잘나고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을 하기 때문이다.


 것도 없고 작은 없고,

나는 것도 하는 것도 없고,

머무르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다는,

절대적으로 평등함을 부처님께서는 나타내신 것이다.


중생

에 대한 바른 분별력이 없어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느니 없느니 자기 생각만을 고집한다.

보이면 있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래는 보이는 것이 모두 자기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무상(無相)실상(實相)임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는 것) 집착하는데 실은 이 몸 아무 의미 없다 알고 집착

버려야 한다이다.

집착하면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보살

이러한 중생들을 불쌍하게 보고 자비심을 내어 구원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에 들도록 한다.


이라 함은

차별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을 떠나 세세생생 변하지 않는 것으로 불도이며 진리이다.

세월이 수 천 억만년이, 아니 수천억만 이 지나도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육체에 집착해 있어서 변하지 않는 실체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범부중생이라고 한다.


범부중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에 들어 한 마음 선한 마음 내어서 선한 마음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된다.


“유여허공 무유이법(猶如虛空 無有二法)이라”

“마치 허공과 같아 두 가지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야말로 중생이 살아가는데,

부처님 이 어떤 것이냐를 나타내는데 있어 바르게 알아야 할 부분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寂]절대적으로 평등법[空]은 두 가지가 아니다.

공(空)적(寂)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인데

분별해서 차별있고, 평등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 부분을 보살은 항상 바른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제중생 허망횡계(而諸衆生 虛妄橫計)

모든 중생은 허망하고 비뚤어지게 헤아린다.”


중생

바른 생각 하지 못하고 항상 허망마음을 갖고 있다.


허망이라 함은 망상을 말한다.

온갖 잡생각이 망상이다.


하룻밤에 집을 열두 채 지었다 허물어뜨리는 마음,

가만히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보다 잘 살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밉고 저 사람은 예쁘고 등 갖가지 분별하는 마음과 번뇌허망이라 한다.


이러한 망상허망횡계 자기중심적이라는 이다.

모든 사물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나라는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사기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보인다.

자기중심적(욕심)에서 떠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지만

자기의 입장을 벗어나기 힘든 존재가 또한 중생이다.


사람이 가진 본성이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족도 만들고,

사회도 만들고, 국가도 만들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상 버리라 하신 것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것이다.


법문할 때

법화경 말씀을 많이 인용하는데,

법화경 속에는 팔만대장경말씀이 모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부터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화엄경까지 다 나온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은 두 가지 세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일불승(一佛乘)이라 한다.


법화경에 들어가면 아주 깊이 배우게 된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된다.


“시차시피 시득시실, 기-불선념 조-중악업 윤회-육취 비제고독

무량억겁 불능자출

(是此是彼 是得是失, 起-不善念 造-衆惡業 輪廻-六趣 備諸苦毒

無量億劫 不能自出)

이를 이것이라 하고 이를 저것이라 하며, 이를 얻었다 이를 잃었다 하며,

선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어 여러 가지의 악업을 지어 육도에 윤회하며,

모든 독한 괴로움을 받아서 한량없는 억겁에 스스로 나오지 못함이라.”


범부중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지은 악업으로 육도윤회하는 고통(허망)에서

빠져나오려고 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냥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 육체가 즐거우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육체는 결국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있어야 돈도 벌고 밥을 먹고 산다.

허망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바르게 이해하여 가지게 되면

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물건이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이 몸뚱어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는 부처를 이루기 위해 생겨난 물건이다.

그러므로 인간 받았을 때 반드시 부처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에 빠져 분별하지도 못하고 비뚤어지게 생각하고,

모든 괴로움을 지어 한량없는 억겁에 스스로 나오지 못한다.


마치

누에고치가 자기가 스스로 지은 실집 안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세상을 눈으로 본다지만 무엇을 보는가? 

사물보는 것 보는 것이 아니고, 바른 것 볼 줄 알아야 진실로 보는 것 된다.


바른 것 진리인데 진리볼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보려고 애를 쓰면 내가 하는 일이 묘하게 변화된다.


노력하지 않고 이루려고 하는 것은 도둑심보다.

도둑심보로 살아가면 보이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하나에 집착해서 그것이 최고인 줄 알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무량의경만 제대로 이해해도

죽기 전에 즉신성불(卽身成佛)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②>
이 몸 받았을 때 반드시 성불해야
                          

“이제중생 허망횡계(而諸衆生 虛妄橫計)

모든 중생은 허망하고 비뚤어지게 헤아린다.”


중생

바른 생각 하지 못하고 항상 허망한 마음갖고 있다.


허망이라 함은

망상을 두고 허망이라 한다.


온갖 잡생각이 망상이다.

하룻밤에 집을 열두 채 지었다 허물어뜨리는 마음,

가만히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떻게 하면 내가 남보다 잘 살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밉고 저 사람은 예쁘고 등

갖가지 분별하는 마음번뇌허망이라 한다.


이러한 망상

허망횡계 자기중심적이라이다.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판단한다.

내가 라는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사기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보인다.

자기중심적(욕심)에서 떠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지만

거기서 벗어나기 힘든 존재가 또한 중생이다.


우리들은

가족도 만들고, 사회도 만들고, 국가도 만들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사람이 가진 본성이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을 듣기도 어렵다.

 

“시차시피 시득시실, 기-불선념 조-중악업 윤회-육취 비제고독

무량억겁 불능자출

(是此是彼 是得是失, 起-不善念 造-衆惡業 輪廻-六趣 備諸苦毒

無量億劫 不能自出)

이를 이것이라 하고 이를 저것이라 하며, 이를 얻었다 이를 잃었다 하며,

선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어 여러 가지의 악업을 지어 육도에 윤회하며,

모든 독한 괴로움을 받아서 한량없는 억겁에 스스로 나오지 못함이라.” 


 “보살마하살 여시제관, 생-연민심 발-대자비 장욕구발 우부심입 일체제법

(菩薩摩하薩 如是諦觀, 生-憐愍心 發-大慈悲 將欲救拔 又復深入 一切諸法)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밝게 관하여 불쌍히 생각하고 큰 자비심을 내어 곧 구해내고자 하며,

또다시 깊이 일체의 모든 법에 들게 함이라.”


범부중생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지은 악업으로 육도를 윤회하는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해야

하는 데도

 ‘그냥 즐겁게 살다 가면 된다, 육체가 즐거우면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육체는 결국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육체가 있어야 돈도 벌고 밥을 먹고 산다.

허망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을 바르게 이해하여 선한 법을 가지게 되면 이 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 몸 받았을 때 반드시 부처이루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먹고 살기위해 몸뚱어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는 부처를 이루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고에 빠져 분별하지도 못하고 비뚤어지게 생각한다.

고통(허망)에서 나오려고 해야 되는데 나오려고 하지 않고,

악업을 지어 수억겁 동안에 육도윤회하고 모든 괴로움을 지어 한량없는 억겁

스스로 나오지 못한다. 


마치

누에고치가 자기가 스스로 지은 실집 안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

금생에서만 을 받고 나온 것이 아니고

과거생 지옥에 갔다가

축생에도 갔다가

사람을 받은 적도 있고,

이렇게 수없는 윤회고를 겪어 왔기 때문에 당연한 걸로 생각하고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보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생을 불쌍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부처님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굳게 가질 수 있도록 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중생은 어떤 희망을 가져야 되느냐? 

부처님지혜를 얻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윤회고를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 지혜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부처님께서는

육체지수화풍으로 흩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계절이 변하는 것과 같은 변역(變易)일 뿐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죽음으로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육체가 변해서 모습이 바뀌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으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인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지만 무엇을 보는가?

사물을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고,

바른 것을 볼 줄 알아야 진실로 보는 것이 된다.

바른 것이 진리인데 진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보려고 애를 쓰면 내가 하는 일도 묘하게 잘 성사 된다.
노력하지 않고 이루려고 하는 것은 도둑 심보다.

도둑심보로 살아가면 보이는 것이 없다.





<법화삼부경 강설- 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③>

우리를 존재케 한 거대한 힘   


"법상여시 생여시법 법상여시 주여시법 법상여시 이여시법 법상여시 멸여시법

법상여시 능생악법 법상여시 능생선법 주이멸자 역부여시

(法相如是 生如是法 法相如是 住如是法 法相如是 異如是法 法相如是 滅如是法

法相如是 能生惡法 法相如是 能生善法 住異滅者 亦復如是)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을 낳고,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이 머무르고,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이와 같은 법이 멸함이니라.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악법을 낳게 하며, 법의 상이 이와 같아서 능히 선법을 낳게 함이니라.

머무르게 되는 것도 다르게 되는 것도 멸하게 되는 것도 또 다시 이와 같음이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은 태어나고, 나면 또 생장하여 머무르죠?

생명체가 살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 것이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이 우주에 존재한 것들은 모두 이 과정을 겪는다.


그렇게 해서 변한다.

잉태되면 잉태되는 순간부터 변한다.

악하고 선한 것도 나오면 머무르다 없어진다.

때에 따라 악한 마음이 나오고, 때에 따라 선한 마음 나오고 하는 것이 중생이다.


보살중생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관찰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보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4가지 상(生住異滅)을 잘 관찰해야 한다.

예를 들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싹이 트면 성장하는 그 과정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건성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냥 싹이 트고 성장해서 열매가 열리면 따먹고 이렇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변한다는 것은 항상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꽃이 피면 아름답게 보이고,

꽃이 지면 지저분하게 보이고,

과일 나무가 성장해서 과일이 열리면 익고,

익으면 따 먹는다.

과일이 달려 있을 때는 탐스럽지만 따버리고 나면 가지가 앙상해서 보기 싫다.


아름다운 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또다시 없어진다.


사람도

나면 존재상의 내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면 없어진다.

멸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 잘 관찰하고 그 진실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변한다는 과정과 거기에 대한 진실을 바르게 알고,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을 보살은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것은 실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머니로부터 내 몸을 받았다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니까

어머니로부터 몸을 받았다는 것밖에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 몸에 들어가서 나오게 된 여러 가지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았으니까 부모한테만 잘 하면 된다.

이웃도 종교도 불교도 필요 없고 나를 낳아 준 사람한테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만 해서는 부족하다.

당연히 부모를 존중하고 효도해야 된다.

짐승도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를 그렇게 사랑하고,

새끼는 어미를 따르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사람인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축생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나기 전 근원에서 우리를 존재케 한 거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힘이 바로 이 우주와 대자연을 변하게 한다.

그 힘이 자연의 재앙을 불러오게도 한다.

악업을 지음으로 해서 그런 자연의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힘의 작용을 우리가 나쁜 쪽으로 받지 않고,

좋은 쪽으로 받으려면 부처님가르침

 ‘하나 밖에 없는 진실한 진리의 불도에 들어야 한다.’

는 바로 그 말씀이다.


사람마다 개성과 갖고 있는 욕망이 다 다르다.

그래서 보살은 그 중생성품욕망을 잘 알아서 설법을 해야 한다.


 ‘법화경이 최고다. 무조건 제목만 불러라’ 하면

기복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법바르게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면

기복이 아닌 부처되는 길 제대로 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기복에 빠지면 설사 아무리 법화경을 한다 해도 과보를 받게 된다.

기복마음으로 잘못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이 부처가 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고

오직 불도를 닦는데 바르고 선한 마음 가졌을 때는 선업을 받는다.

그래서 부처되는 것이다.

나쁜 짓 좀 해도 법화경만 열심히 하면 구원받겠지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코 그런 것이 법화경이 아니다.

사경만 하면 잘 된다고 하니까 사경만 죽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자체기복마음이지 성불하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다.


부처님께서 하심은 전제 조건 있다.

선한 마음이 전제 되어야 한다.


선한 마음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악한 일을 저질러 놓고

법화경만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분대로 내 마음에 안 들면 남의 뒤통수를 치고,

가다가 아무나 걷어차 버리고,

집에 와서는 법화경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습니까?


법화경바르게 알아야 한다.

한 사람에게만 해도 그 공덕무량하다고 경문에 나온다.


법화경을 석 달만 배우면 여러분도 스님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 자기 마음 밝아지고,

가족이 밝아지고, 내 이웃이 점점 밝아져 이미 성불은 예약되어 버리는 것이다.


법화경을 바르게 공부하면 다 그렇게 된다.

이왕 에 들어왔으면 남보다 더 빨리 부처가 되면 얼마나 좋은가.


전생에 지은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받더라도 그것이 편안한 속에서 다 지나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내 마음이 다 편안해져 버린다.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생활하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보살은 그렇게 중생들의 마음을 잘 알아서 해야 한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④>

실상(實相)을 아는 사람 
                                           

“설법무량고 의역무량, 무량의자 종일법생 기일법자 즉무상야,

여시무상 무상불상 불상무상 명위실상

(說法無量故 義亦無量, 無量義者 從一法生 其一法者 卽無相也

如是無相 無相不相 不相無相 名爲實相)

설법이 한량이 없는 고로 그 뜻도 또한 한량이 없느니라.

무량의경은 하나의 법에서 나며 그 하나의 법은 곧 무상이라.

이와 같은 무상은 모습이 없고 모습이 아니니라.

모습이 아니며 상이 없음을 실상이라고 하느니라.”


무량의경

무량한데, 이 무량부처님선법

모두가 다 하나 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 일불승 묘법연화경임을 알아야 한다.


무상불상(無相不相)

‘상이 없다’

는 말씀은 차별을 떠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들도 부처성품본성을 가지고 있다.

‘상이 아니다’ 하는 것은 차별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차별도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없다’ 것은 본래의 성질을 뜻하는 것이고,

 ‘아니라’ 것은 작용한다는 뜻이다.


다 가지고 있는 부처성품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상이 없는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선하다 악하다 하고 차별하지만 언제까지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닌 것은 상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불상(不相)이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나의 형상에도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하셨다.


말씀을 가지고 어떤 종단에서는

부처님 형상에도 의지하지 말라하면서

예불도 혹 등한히 하는 스님이 있는 줄 안다.


부처님께서 열반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는 말씀을 남겼다고 해서 경문을 등한시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하신 것은

사람의 형상(중생심)으로서 하시지 않았다 이지

부처님께서 문자 그대로 아무 말씀 안했다 아니다.


사람의 형상 인본존으로서,

사람으로서 된 이 자체 가지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본래부처본불(本佛)나타내기 위한 말씀 이다.


일승법묘법연화경이 바로 본불이다.

그래서 묘법연화경아니면 불상개안(開眼)안 된다 하신 것이다.      


“무상 명위실상(無相 名爲實相)

상이 없음을 이름하여 실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설법

무량하지만 이 무량법문은 하나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고 무량부처님법문이 하나인 묘법연화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곧  ‘실상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냥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명료하게 아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바로 보아야 된다.

물이 산으로 올라 갈 수 없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이런 것을 바로 볼 줄 알아야 된다.


그러나

그 자체만을 보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물은 위에서 내려오지 역류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안다고 해서

‘실상을 아는 사람’ 아니다.


부처님무량이 나오는 하나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고

그것을 하고 가르치는 사람

 ‘실상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이다.


부언하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 것이 실상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무량법문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을 알며,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자 내 몸을 던져서 하나인 으로써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실상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신 이다.


사바세계불국정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불승(一佛乘)묘법연화경실행해야 한다.


누구라도 다 불국토 되기를 원하고,

불국토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가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 이런 사람 또한 ‘실상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곧 개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주위를 밝게 해서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대보살하는 바는

부처님가르침으로 인해서 깨달아 아는 것을 반드시 중생들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일깨워서 하나도(道)일불승에 들 수 있도록 인도해서

가장 큰 부처님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보살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중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이익이 된다.

이 이익이 생기게 되면 중생들은 모두가 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른 마음 가지고 묘법연화경을 읽어보면 실로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잠이 와서 못 읽겠다는 사람도 많다.

밖에 나가서 바람 한 번 쐬고 세수를 하고서라도 읽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한테 지는 사람은 자기 소망도 이루기 어렵다.

불도를 닦는 사람이 게으르면 안 된다.

잠자는 시간을 한 시간씩 줄여서 을 읽으면 8일 만에 한권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항에 계시는 팔순의 신도 한 분이

묘법연화경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읽고 죽어야겠다, 싶어

13번 시도 끝에 읽어냈다는 이야기를 불자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13번 만에 눈에 글이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처음에 을 읽으려고 하니까 글자가 하나도 없고, 바닥이 새까맣게 보였다.

목욕하고 눈을 닦고 읽으려 해도 안 되니까 13일째 되는 날은 내가 죽어도 한 번 읽고 말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첫 장을 넘기니까 그제서야 글이 살아서 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춤을 출 듯이 기뻤다.


옛 설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 불자들은 이보다 더 묘한 일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다.


“무량의경 문리진정 존무과상(無量義經 文理眞正 尊無過上)

무량의경은 문리가 진정하고 존귀하여 다시 더 할 바가 없느니라.” 


‘문리가 진정하다’

법화경드러내기 위해 하기 때문에 이 이상의 가르침 없다 말씀이다.

42년 동안 방편가르침에는 일불승을 드러내시지 않았다.


그러나

무량의경에서 일불승묘법연화경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리 말씀하시니까

이 얼마나 고마운 가르침인가.

그러니 문리진정(문자와 이치가 바르다)하고 존귀하다는 뜻이다.

일불승묘법연화경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내는 것이니

이 이상 더 좋은 이 어디 있는가라는 말씀이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⑤>
무상보리를 이룩하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이 닦고 배울지니라
                        

삼세제불 소공수호 무유-중마 군도득입, 불위- 일체 사견생사 지소괴패.

시고 선남자, 보살마하살 약욕질성- 무상보리,

응당수학- 여시심심 무상대승 무량의경

(三世諸佛 所共守護 無有-衆魔 群道得入, 不爲- 一切 邪見生死 之所壞敗.

是故 善男子, 菩薩摩訶薩 若欲疾成- 無上菩提,

  應當修學- 如是甚深 無上大乘 無量義經)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수호하시는 바이니, 여러 마의 무리들은 도를 얻어 들어오지 못하며,

일체의 사견과 생사에서 이를 무너뜨리지 못하리라.

선남자야, 이런고로 보살마하살이 만일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이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을 닦고 배울지니라.  


무량의경

문자의 이치가 진실하고 진정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삼세 부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이다.


그러므로

무량의경외도 사도마구니들이 감히 어지럽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무량의경을 바르게 배움으로써 자기 자신이 사도외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모든 사물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

알아야 한다.


자기 생각에 맞추어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기 자신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불교믿는 마음 무너지는 것

불교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사견과 사도, 외도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보살들도 부처님지혜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무량의경

반드시 닦고 배우라 하신 것이다.


그럼으로써

대보살들은 진실하고도 편안마음으로

중생들에게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 쾌락을 받게 한다.

이러한 대보살자비밝고 밝아서 결코 헛되지 않다 말씀하신 것.


이시 대장엄보살 부백불언(爾時 大莊嚴菩薩 復白佛言)

그때 대장엄보살이 또 부처님 말씀드리되.
부처님설법은 실로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중생의 마음은 미혹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므로 대장엄보살이 간곡하게 한 번 더 부처님설법주실 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청 받아 드려서 가야성 보리수 아래서 증득하신 그때부터

40여년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중생 위해서 진실 드러내신다.


부처님

중생들에게 하실 때 4가지 형태 하셨다.

고(苦)와 공(空)과 무상(無常),무아(無我).

이렇게 4가지 형태로써 42년 동안 방편의 가르침으로 설법을 하셨다.


고(苦)라는 것은

생,노,병,사 두고 한 말씀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것을

인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 것이다.


고제(苦諦)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에 만족함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설하신 것이다.


여러 가지 분류하는데

먼저 으로 받는 고[外苦]에는

외부 환경로부터 받는 것과 선천적으로 받는 것이 있고,

마음으로 받는 고[內苦]가 있다.


외고로 갑자기 악한 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고통과 짐승,

자동차로 인해 받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유정으로 인한 것이고,

물, 바람, 불처럼 자연으로 오는 고도 있다.


마음으로 생겨나는 에는

생,노,병,사 있다.

생,노,병,사라고 하면 단순하게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인생 것이다. 

 

인생

우리가 잘 보내느냐 못 보내느냐 하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생활하다보면 거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을 해서 헤어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파괴될 때, 느끼는 고통인 괴고(壞苦),

우주 삼라만상이 변해갈 때 느끼는 고통인 행고(行苦),


이외에도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등이 있다.

‘석씨요람 보살장경’

사람에게는 열 가지의 고(苦)가 있다고 해 놓은 부분이 있다.


첫째

생,노,병,사의 4가지와 수고(受苦), 원고(願苦), 고수(苦受),

우고(憂苦), 번뇌고(煩惱苦), 유전대고(有轉大苦)가 있다.


유가론 논서 보면 110가지 있다고 했다.


열반경 제 16 보면 상, 중, 하의 고 있다고 했다.
라는 것이 모두가 다 살아가면서 받는 것을 말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 자체를 고(苦)라고 한다.


어떤 분이 

내가 법화경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인 줄 알고 이런 글을 보내와서 받은 적이 있다.


‘실상묘법연화경’이나 ‘나무묘법연화경’ 제목

부르라증문은 한 군데도 없다고 해놓고, 

생 . 노, 병, 사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 불교는 미신이 되어 버린다.


사람

나면 늙게 마련이고, 늙으면 병들어 죽기 마련이다.

이것이 부처님하신 진실말씀이다.


그러나

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을 밝히신 것이 불교다.


이 사람은 불교를 너무 잘못 알고 있었다.

법화경을 이런 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지럽다고 하는 것이다.


삼계(三界)대 도사이신 부처님가르침

오늘날 죽은 사람의 극락 왕생 빌어 주려고,

산 사람은 극락 가려고 있는 게 결코 아니고,

일체 중생성불(成佛)위해서 설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라는 것 생 노 병 사라는 인생이다.

사람이 나서 죽을 때까지의 모습,

즉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고통이다.

이러한 것을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리니까 답답하다.


거기다가

묘법연화경에는 제목부르라증문이 한군데도 없다고 해 놓았다.


과연 그러한가.

법화경 사구게송(四句偈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다.


묘법연화경 여래신력품 제21

 “여래일체소유지법(如來一切所有之法)

여래일체비요지장(如來一切秘要之藏)

여래일체자재신력(如來一切自在神力)

여래일체심심지사(如來一切甚深之事)”

사구게이 바로 ‘제목5자’ 이다.

제목5자 모든 것 갖추어져 있다이다.


내가 팔만대장경을 살펴보니

천태대사묘법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도 하고,

대승묘법연화경이라고도 나타냈다.

이미 제목 천태대사가 불렀다.


속 고승전 천태지의전에 보면

사람이 죽기 전에 묘법연화경제목부르면

묘법 삼력공덕으로 윤회신을 받지 않는다고 밝혀 놓으셨는데

무슨 제목부르라증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그 분은 어문연구소에 있는 사람인데,

부처님의 말씀은 학문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스스로 학문에 빠져 있으면서 남한테 학문에 빠지지 말라고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법화경을 약간의 문자적으로 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바르게 공부해서 바르게 아셨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팔만대장경에 있는 증문을 보았으면 한다.


여러분에게

법화경 이렇게 잘 못 알고 함부로 하는 사람도 있으니

분별바르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



십지(十地)의 단계만 이르게 되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십지가 중요하다 하겠다.

 


환희지(歡喜地)-남에게 가르침을 줘서 항상 기쁘게 하는 것.


   받아들이는 자가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을 주기도 힘들고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힘들다.

 


이구지(離垢地)-번뇌를 벗어나는 것.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매사 남이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하는 것은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불평불만이 있다.

  

   남이 하는 것을 존중하고, 내가 하는 것은 상대가 납득할 수 있게 충분한 설명을 해줘야 한다.



발광지(發光地)-빛을 발하는 것.

 

   마음으로부터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게 되면 주위를 밝게 하는 단계이다.


  불법을 설하지 않고는 이런 경계에 오를 수 없다.


   불법을 바르게 설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발광지라고 한다.

 


염혜지(焰慧地)-불도를 닦게 되면 번뇌가 사라져 더욱 빛이 나서


    불꽃이 더욱 강하게 피어나는 것 같이 주위가 점점 밝아지는 단계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믿음을 가져서 폭이 넓어지는 것이 염혜지다.


    사도나 외도로 중생의 마음을 이용해서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왕성하게 가르쳐서 주위를 더욱 밝게 한다는 뜻이다.

 


극난승지(克難勝地)-진속(眞俗) 이제(二諦)가 하나가 되는 경계다.


     진속의 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속은 세속의 생활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세상일이 완전히 합일되는 경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 부처님 마음과 같이 바른 마음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경계이다

 


현전지(現前地)-모든 사람이 구원 받아서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이 있는 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분명하게 알게 되는 단계.

    즉 수행을 열심히 하더니 부처님의 경지에 가까이 있구나 하는 것 눈으로 보듯이 스스로 알게 되는

    단계이다.


    부처님이 내 앞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분명하게 알게 된다.

 

원행지(遠行地)-소승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단계.

   

    화엄경의 공의 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불도부처님 정법인 묘법연화경

    들어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해서 소승에서 벗어나 대승에 들어 물러남이 없는 단계다.


    실제로 이런 경계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소승에 집착하여 소승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니까 법에 들어 왔다가도 물러나게 된다.

 

부동지(不動地)-중생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바르게 수행하게 되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단계.


    우리가 이 을 바르게 믿고 행하면 부처님지혜에 들 수 있다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단계이다.

 

선혜지(善慧地)-완전한 지혜를 갖춘 단계.

    사물을 정확하게 볼 줄 알아서 언제라도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는 단계이다.

 

법운지(法雲地)-구름이 하늘에 퍼지는 것과 같이 갖추고 있는 지혜의 힘이 모든 사람들 위에

    퍼져서 저절로 모든 중생구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단계이다.


   부처님지혜를 갖추게 되면 저절로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고 구원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십지 수행보살지를 이루는 단계이다.


    십지에서 노력하면

    완전한 보살의 경계인 등각에 올라서 부처님의 지혜묘각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불안관(以佛眼觀)-일체제법(一切諸法) 불가선설(不可宣說)

   소이자하(所以者何) 지제중생(知諸衆生) 성욕부동(性欲不同)

   성욕부동(性欲不同) 종종설법(種種說法) 이방편력(以方便力)

   사십여년(四十餘年) 미현진실(未顯眞實) 시고중생(是故衆生)

   득도차별(得道差別) 부득질성(不得疾成)-무상보리(無上菩提)


   부처님의 눈으로 일체 모든 법을 관하였으되 선설하지 아니하였노라.

    모든 중생의 성품과 욕망이 같지 않으니까 가지가지로 법을 설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수많은 중생들의 성품이 다르기 때문에 방편의 힘으로써 설했지 진실로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40여년에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러한 고로 중생불도를 닦아 얻는 것에도 차별이 있다.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 얻듯이 이렇게 다르다.

    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하시지만 받아들이는 중생의 근기는 다르기 때문에 

    수승한 사람은 아라한과를 얻고근기하열한 사람은 수다원과 밖에 얻지 못한다.

    그래서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지 못한다.”

 

    는 말씀이다.


   대장엄 보살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가져서 바르게 믿고 노력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니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대장엄보살의 간청에 의해서 부처님께서

    “40여년에 설하신 가르침은 진실이 아니다.”

   라고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50년 동안 설하신 수자의(隨自意) 설법과 

   수타의(隨他意) 설법, 두 가지 나눈다.



   수자의 설법

  부처님 스스로 설하신 이고,


   수타의 설법

   듣는 사람의 희망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타의 설법

    진실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고,


   수자의 설법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실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대로 하신 가르침인 이다.


    “부처님으로 일체 모든 하였으되선설하지 아니하였노라.”


  부처님눈이라 함은 깨달으신 지혜의 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 실로 미묘하다.

   

    일체법이라 함은

     이세상의 모든 사물,


     즉 우주에 있는 일체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 모든 것을 나타낸 것을 일체법이라고 한다.


     생명을 유지시키며 성장시키는 활력소, 그것을 밝혀 놓으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같은 것이 없다.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사물은

     실로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고자 해도 설명 못할 정도로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심성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진실한 을 지금까지 하지 않으시다가 들의 근기숙성시켜서

     이제야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는 뜻이다.

 

     일체의 모든 사람들은 성질과 생각하는 것,

    욕망이 다 다르기 때문에 42년 동안 방편으로써 중생을 가르쳐 왔노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만 가지고 간단하게 너희들이 이러니까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면 되겠지만

     성품, 욕망 모든 것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만 가지고는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면

     우리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것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갖가지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는 것,

     숨 쉬는 것조차도 다 나타내 놓으셨다.

     이렇게 수많은 하신 것은 방편의 힘이었다는 말씀이다.


   방편력이란

    사람마다 원하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맞게 하는 이다.

    제각기 다른 성품 갖고 있기 때문 부처님께서는 방편하시고,

    또한 중생들은 방편가르침듣고 받아들이는 근기따라서 

    얻는 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 지혜빨리 들지 못한다 말씀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실로 중요하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42년 동안 설하신 일체 법하책하신 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물의 비유하신다.


   물은 똑 같은 물인데 바닷물이나 샘물이나 강물이나

   연못물이나 시냇물이나 물은 물이다.

    그러나 물은 물이로되 물이 처해 있는 곳에 따라 다르다.

    

   시내가 있고, 연못이 있고, 샘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물이 있는 곳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물은 다 똑 같지만 다르다는 것, 바로 이것인 것이다.


  부처님가르침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중생들의 번뇌를 씻게 해 주는 데는

   처님의 가르침 자체가 나름대로 어느 경계에 오를 때 까지는 차별이 없다.


   차별하지 않고 번뇌를 씻을 수는 있으나 새로운 번뇌가 생겨났을 때는

   하나만 가지고는 다시 살아나는 번뇌를 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번뇌가 생기면 어느 한 경계까지는 그 번뇌를 씻을 수 있지만

   새로운 번뇌가 생겨나면 그 하나만 가지고 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의 하신 것이다.



   적은 양의 물을 가지고는 

  큰 물건 씻을 수 없듯이

   작은 번뇌 작은 으로 씻을 수 있으나

   큰 번뇌 씻을 수 없고 으로만 가능하다.

     

   이것 부처님가르침이다.

       

   그래서 수많은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여러 단계가 있다.


   다시 말해

   흐르는 물, 샘물, 시냇물 같이 작은 곳 있는 물

   처님께서 하신 낮은 같다의미.


   냇물과 연못물은 강물로 흘러서 결국 바다로 간다.

  바다는 넓고 깊고 크다.

   

   부처님

   낮은데서 좀 더 높은 곳으로,

  또 높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중생근기에 따라 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하신 경전도 높고 낮음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이다.

 

   처음소승하셨다.

  소승이승이고,

  이승성문 연각인데 이 성문 연각을 위해 소승경하시고,

  보살을 위해서는 대승경을 설하신다.

   

   따라서

   성문, 연각, 보살은 그 경계가 다 다르다.


    이제는 너희들이 알만큼 알았으니까

    에 들어서 부처님지혜에 들어야 할 것 아니냐.

    방편법을 버리고 부처가 되어야 할 것 아니냐.


    그래서

   묘법연화경에 들기 하기 위해서 무량의경을 하신다.


    무량의경을 닦고 배우면

    반드시 묘법연화경들어서 부처님지혜얻게 된다가르침인 것이다.


    부처님가르침 하나만 보면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

    어느 한 의 일부분만 보고 이것이 최고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불교가 이렇게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량의경 설법품이 아주 중요하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문사수일文辭雖一 이의각이而義各異 

    

선남자(善男子) 수수구세(水雖俱洗 이정비지(而井非池)

지비강하(池非江河) 계거비해(溪渠非海).

이여래세웅(而如來世雄)어법자재(於法自在),

소설제법(所說諸法) 역부여시(亦復如是).

초중후설(初中後說) 개능세제(皆能洗除) 중생번뇌(衆生煩惱),

이초비중(而初非中), 이중비후(而中非後 ),초중후설(初中後說)

문사수일(文辭雖一 ), 이의각이(而義各異).

선남자야 물은 비록 다 같이 씻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샘은 못이 아니요,

못은 강하가 아니며, 시내는 바다가 아니니라.

여래세웅이 법에 자재하시어 설한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니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시냇물과 연못물과 강물과 바닷물과 같이

부처님가르침도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있다.

, 경계에 따라 설하신 것이다.

 

성문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연각의 지혜라 할 수 없다.

성문경계성문경계이고, 연각경계연각경계이다.

성문이 알고 있는 지혜연각지혜가 다르고,

부처님경계보살경계로써는 감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드시기 전

열반경에서 말법시대4군데 의지처(依支處)정해 주셨다.

()의지하고, 사람의지하지 말라.

    사람이라 함은 조, 선사, 논사 지칭한다.


지혜(智慧)의지하고, ()의지하지 말라.

    지혜라 함은 부처님지혜이지 보살지혜아니다.

    부처님지혜의지하라이다.


    이라 함은

    관세음, 문수, 보현 등 일체 모든 보살이라 했는데

    하물며 달마대사육조 혜능이나 조사 선사들의 지혜

    지혜가 아닌 이라고 하셨다.


의지하고, 의지하지 말라.

    이라 함은

    부처님진실한 뜻으로 그것은 바로 묘법연화경이다

   묘법연화경의지하고 조사, 선사, 논사들의 의지하지 말라.

   

    이라 함은

    고대의 조사, 선사, 논사 말도 말인데

    하물며

    이 말법시대에 스님들이 하는 말을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겠는가?

    스님들의 법문에 불과하다.

 

    내가 강설하는 것도 말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부처님에 따라 법화경하는

   (부처님)가 보낸 자

    라고 묘법연화경 법사품에서 말씀하셨다  

    이

    부처님의 뜻에 따라 반드시 법을 설하라

    고 하는 부처님이다.

  부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나는 따를 뿐이다.

  

    그래서

   법화행자가 하는 법화경 강설은 말이 아니라

  부처님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것임을 잊지 말 일이다.


요의경(了意經)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意經)의지하지 말라.

   방편품에서

   “이제야 내가 만족한다[今者已 滿足].”

   라고 말씀하셨다.


   요의라 함은 만족함이다.

   묘법연화경을 하심으로 해서 부처님께서 만족하신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요의경이라 함은 묘법연화경이고,

  금강경, 화엄경, 반야경 등 일체 42년 동안 설하신 모든 경전은 불요의경이다. 

   이렇게 의지할 곳을 열반경 권 제6에 명백하게 정해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또한 중생들의 미혹한 마음을 씻어버리는 데는

   3가지 4가지 얻음과 2가지 ()가 있음을 설하셨다.

  

   3가지 법이라 함은

   연법. 정법, 인법이고

  

   4가지 얻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하고,

   2가지 도()소승대승을 말한다

  

   소승대승

   법화경에 들게 되면 하나가 아니고, 소승은 소승일 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법화경에 들면 · 소승 전부 하나가 된다


   일체 소승대승을 통합시킨 묘법연화경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에 자재하시기 때문에 설하신 이 선후가 있고높고 낮음이 있다.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다.

 

   은 다 똑 같다고 말하는 스님들이 있지만

   그것은 부처님 말씀어긋나는 견해이다

  

   말씀하셨듯이

   샘은 샘이지 연못이 아니고, 연못은 연못이지 강이 아니고강은 바다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하신 도 각각 다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낮은 가르침부터 다시 깊은 가르침으로 들어간다.

  

   하나하나 해서 높은 곳으로 설해 가시는데 이걸 깊다고 한다.

   얕은 가르침을 하고 난 후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일불승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데, 일불승이라 함은 가장 낮은데서 부터 가장 깊은 곳까지의 이 모두 들어 있다.

 

   그것이 일불승과 일반 , 대승경과의 다른 점이다.

   중생들은 낮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낮은 가르침을 배우고 나면 불자들은 99%가 거기에 만족한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뭔가 아직 더 있을 것이다 하고 찾아야 한다.

   그런데 찾지 않고 거기에 집착해 버린다       

   그러나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뭔가 있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방편의 문을 열어 진실의 길로 이끌어 들인다는 이 된다.

   낮은 에 들어서 뭔가 있을 것이다 해서 찾다 보면 만나게 되어 진실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다 능히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제함이나

  처음은 중간이 아니요 중간은 끝이 아님이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함이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뜻은 각각 다름이 있느니라.”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처님께서는

  42년 동안 설하신 가르침으로 중생들의 번뇌를 씻어 주는 것은 똑 같으나

  처음에 하신 가르침 

   즉,

  부처님이 되셔서 처음 하신 화엄경중간하신

   지금 하고 계신 무량의경

  하신 열반경 세 가지 같을 수 가 없다.

  

   화엄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부처님높고 높은 지혜 얻는다 말씀하셨다.


   거기에서

   아뇩다라샴먁삼보리얻는다말씀

   지금 무량의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얻는다

   열반경아뇩다라삼먁삼보리얻는다

   똑같으나 각각 다름이 있다 하신 것이다.

   얻는 경계각각 다름 나타내신 것이다.


   화엄경에서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

  아라한과를 거쳐 보살과에 든다는 것이고,

    

   무량의경

   묘법연화경 여는 이기 때문에 

   화엄경쓰인 말과 같지만 다르다.   

  

   열반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마찬가지다.

     

   반경

  묘법연화경 홍통하는데 있어서 도움주는 이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에서 하지 못한,

   예를 들어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나면 이삭이 남는데

  그 이삭을 줍는 것과 같은 가르침열반경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 가지 에서 똑같은 말로 하셨지만

   달라 차이가 많이 난다는 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지만

   처음부터 법화경하시게 되면

  알아듣지 못하므로 쉬운 것부터 먼저 하시고,

   점차 멀리 있는 것 조금씩 당겨 완전하게 가르침 주신다.

 

   처음부터 먼 데 있는 것을 주려고 하면

   중생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받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까운데서 부터 점차 먼 것 나타내어 중생들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라

   생각하시고 설법을 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함이 말은 비록 같을지라도

  은 각각 다름이 있다고 밝히신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대학원생이 쓴 논문을 주면 이해하겠는가

  

   부처께서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수준에 맞춰 해서

   마지막압축시켜 집대성해서 묘법연화경 하신 것이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부 처 님한 말 씀’ 

 

 시고(是故) 선남자(善男子) 자아득도(自我得道) 초기설법(初起說法)

지우(至于)-금일(今日) 연설대승(演說大乘) 무량의경(無量義經)

미증불설(未曾不說) -() () 무상(無常)무아(無我) 비진비가(非眞非假)

비대비소(非大非小) 본래불생(本來不生) 금역불멸(今亦不滅) 일상무상(一相無相)

법상법성(法相法性) 불래불거(不來不去) 이중생(而衆生) 사상소천(四相所遷).

선남자(善男子) 이시의고(以是義故) 제불(諸佛) 무유이언(無有二言)

이런고로 선남자야, 내가 도를 얻고 처음에 일어나 법을 설함으로부터 오늘 대승의 무량의경을 설함에

이르기까지 아직 일찍이 고와 공과 무상(無常)과 무아와 비진과 비가와 비대와 비소와 본래 생하지도

않아 이에 또한 멸하지도 아니하며, 일상(一相)과 무상(無相)과 법상과 법성,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나 모든 중생들이 네 가지의 상으로 옮겨진다고 설하노라.

선남자야 이러한 뜻이 있는 까닭으로 하여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두 가지의 말씀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설법품에서 계속 중요한 말씀 하고 계신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방편가르침고 공 무상무아 비진비가 비대비소,

본래불생 금역불멸 일상무상, 법상법성 불래불거 하여

부처님진실한 뜻 드러내신다.

 

()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부처님지혜를 갖출때까지 정진해야 한다.

 

부처님하신 는 지속적인 정진필요함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라 함은

평등인데 중생차별하는 마음있어서 인간 머물러 있게 되면 괴롭다.

그래서 수행지속적으로 해서 한 경계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無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똑같은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은 없음을 하신 것이다.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고 있는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아야 한다.

 

변하고 있는 것에 마음을 멍하니 두고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세월은 무상하니 부지런히 이 받았을 때 부처가 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무아(無我)

자기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여 믿을 수 없음으로 자신에게 집착하지 말고 초월하라 것이다.

 

사람마음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므로 자기라는 것도 순간순간마다 변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와 남을 즉 모든 것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 무아경지라고 한다.

 

비진비가(非眞非假)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 진실이 다 거짓이라고 차별해서 말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비대비소(非大非小)

크다 작다는 것을 구별하는 것도 눈에 보이는 일시적 현상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상무상(一相無相)

모든 사물은 갖가지 모양으로 차별이 있으나 그 근본은 하나지 둘이 아니라는 것,

평등차별초월이치진리로서, 진리하나지 둘이 아니다.

그 하나가 바로 일불승이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진리

일불승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법상법성(法相法性)

이란

우주 만물만상에 있는 모든 사물(생명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형상, 성질, 성품이 다 다르고,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변하는 것은 순간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대. 무소. 무생. 무멸. 일상. 무상. 법성. 법상. 불래불거. 불출불몰

무상과 무아 되풀이 한 말씀이다.

변화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되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변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상소천(四相所遷),

() () () ()한다.

생겨나서 머물러서 변하고 없어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중심이 없이 흔들리어 이랬다, 저랬다, 한다.

이처럼 변하는 것에 중생들은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한 우주 법칙(진리)에 순응하는 을 체득해야 한다.

 

제불(諸佛) 무유이언(無有二言)

일체 모든 부처님 두 가지 말씀이 없다


는 말씀은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방편력으로 많은 하셨지만

그것은

일불승 하나에서 나온 것이지

방편이라는 따로 있는 것 아니라 이다.

 

부처님께서는

일불승 한 말씀으로 하시지만

중생들은 저마다 업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는 내용이 다르다.

따라서 제각각 얻는 차이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경지들게 하고자 하시는 부처님목적

과거부처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래미륵 부처님이나 다 똑같다. 차이가 없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바른 마음으로

부처님정법가지고 바른 행 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님목적 하시는 대로 모두가 다 성불 할 수 있다 이다.

 

이러한 이 있는 까닭으로 하여 일체 모든 부처님

두 가지 말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본래 하나.


하나 밖에 없는데

화엄경이 있고

반야경이 있고

방등십이부있고

아함경이 있느냐고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84 법문결국 하나에서 나온 것이지

별개의 것이 아닌 것임을 무량의경 설법품에서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일불승이다.

이 우주 삼라만상 천상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진리,

 이것은 바로 일불승 묘법연화경이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

한 가지 말씀 밖에 안 하시는데


중생

한 입에 열 마디도 더 하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한다.

 

사람은 말을 들을 때 잘 들어야 한다.

잘못 듣고 자기 기분대로 자기 생각대로 말해 버리면 싸움 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바르게 듣고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귀를 열고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들으면

부처님 한 말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화삼부경 강설-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중생의 마음을 부처의 성품으로 바꾸라  


 능이일음(能以一音) 보응(普應)-중성(衆聲),

능이일신(能以一身)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他)

무량무수(無量無數) 항하사신(恒河沙身).

일일신중(一一身中) 우시(又示)-약간(若干)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他)

아승지(阿僧祗) 항하사(恒河沙) 종종유형(種種類形), 일일형중(一一形中)

우시(又示)-약간(若干)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他) 아승지(阿僧祗)

항하사형(恒河沙形). 선남자(善男子),

시즉제불(是卽諸佛) 불가사의(不可思議) 심심경계(甚深境界),

()-이승소지(二乘所知), 역비(亦非)-십주(十住) 보살소급(菩薩所及).

유불여불(唯佛與佛) 내능구료(乃能究了).

능히 한 가지 말씀으로써 널리 모든 중생의 여러 가지 말에 응하며,

능히 한 몸으로써 백천만억 나유타의 한량없고 수없는 항하사의 몸을 보이느니라.

하나하나의 몸 가운데서 또한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항하사의 가지가지의 종류와 형용을 보이느니라.

하나하나의 형용 가운데서 또한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항하사의 형용을 보이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심히 깊은 불가사의의 경계이니 이승이 알 바가 아니며,

또한 십주(十住)의 보살도 미칠 바가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이를 연구하여 아시느니라.”


부처님은 항상 그 사람에게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경계는 불가사의한 경계이고 실로 알 수 없는 경계라는 뜻이다.

처님경계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이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부처님지혜는 실로 부처님만이 아신다.

부처님의 경계에 가까운 보살10가지 경계 십지 보살

감히 부처님지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학문적으로만 해석하게 되면

부처님 뜻과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다.


학문적으로만 이해하면

보살성문 연각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잘못 이해하게 되면 보살 성문

무시하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범부 중생일지라도 무시하지 않으신다.

무시하여 너희들은 모른다는 뜻이 아니고,

항상 부처님께서는 중생가르치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희들의 경계로서는 부처님 지혜 도저히 알 수 없으나

수행하면 범부 중생도 부처될 수 있다 것을 은근하게 나타내신 것이다.

중생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자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희망을 주는 그런 말씀이다.

그래서 일불승에 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혜는

 부처님 부처님만이 아신다.’

고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하나하나의 몸 가운데서 백천만억나유타 항하사 가지가지의 종류와 형용을 보인다.

,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이런 모습을 나타내서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저런 모습을 나타내시기도 한다.

중생의 얼굴로도 나타나시고,

성문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시고,

연각이나 보살의 모습으로도 나타나신다.

그래서 그들의 근기에 따라서 가르쳐 주신다는 뜻이다.


이러한 부처님 깊은 경계

이승이나 십주보살도 감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부처님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남자(善男子), 시고아설(是故我說) 미묘심심(微妙甚深) 무상대승(無上大乘)

무량의경(無量義經), 문리진정(文理眞正) 존무과상(尊無過上) 삼세제불(三世諸佛

소공수호(所共守護), 무유(無有)-중마(衆魔) 외도득입(外道得入),

불위(不爲)-일체(一切) 사견생사(邪見生死) 지소괴패(之所壞敗),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약욕질성(若欲疾成)-무상보리(無上菩提),

응당수학(應當修學)-여시심심(如是甚深) 무상대승(無上大乘) 무량의경(無量義經)  선남자야, 이런 까닭으로 내가 설하노라.

미묘하고도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은 문리가 진정하며 존귀함이 다시 더 위가 없느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바이니,

모든 마와 외도는 들어오지 못하고 일체의 사견과 생사에 헐려 무너지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만일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은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을 닦고 배울지니라.”


부처님께서 하시는 무량의경이 깊고 미묘해서

지금까지 설법하신 것 중에서 가장 높고 존귀해서 하나도 거짓이 없고,

문자의 이치가 진실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마와 외도는 들어오지 못한다.

 

또한 삼세제불이 지키시기 때문에 마구니들로부터도 일체 방해를 받지 않고

지금까지 하신 부처님가르침에서 물러나지 않는 그런 용기와 힘이 생긴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구니 말한다.

법화경을 한다고 해서 마구니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법화경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그가 제일의 마구니다.

법화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자기 자신은 낮추지 않고 상을 높이고 문자로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결코 바른 불자 되지 못한다.


문자로 안다는 것은

제목 봉창을 부정하거나

부처님께서 제목을 부르라

한 경문이 한 구절도 없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태도는

법화경을 할지라도 가장 큰 마구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외도다.

법화경만 들고 있다고 해서 마구니와 외도가 아닌 것이 아니다.


법화경진실한 뜻

호도하거나 사견을 가지고 남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이 곧 외도다.


불교

, 부처님가르침을 믿는 것처럼 하면서도 삿된 견해 가지고

하는 것이 외도이고,


사도(邪道)라고 하는 것은

불교 외의 일체 모든 종교를 말한다.

그것을 구분해야 한다.


무량의경공부하면

 일체의 사견과 생사에 헐려 무너지지 않는다.”

고 하신 것은

부처님경지를 이룰 때까지 , 부처님경지들 때까지

아주 지속적으로 이 을 받아가지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을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은

항상 변하고 있는 이 세상살이에 마음이 수시로 따라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무량의경을 닦고 배우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 굳게 가진 마음이 허물어지거나 변해서 중간에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부처님가르침바로 배워서 마음이 견고해지게 되면

외도사도에 집착하지 않고, 사도외도로 인해 신앙하는 마음,

믿는 마음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사견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부처님가르침설법하고자 한다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직 부처님을 가지고 전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라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부처님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화경

그 어떤 가르침보다 이해하기 쉽고 생활에 밀접하게 각자의 성품에 비추어 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을 가지고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된다.

이익을 구하고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익

부처님가르침을 바른 믿음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하면 저절로 그 과보가 생겨난다.


그러니

별도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이 가지지 않아도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을 버리고 성품바르게 하라

부처님께서 하신 이기 때문에 주로 성품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부처님중생성품에서 부처성품으로 바꾸라고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정말 불법을 배우고자 법문을 듣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참회하는 마음 갖게 된다.


그런데

법문을 듣지 않는 사람,

즉 자기 이익을 쫓아서 하는 사람은 아상이 높아 그것이 자기 자신하고

연관이 되는 부처님가르침인데도 부정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견에 들어 있어 정법의 가르침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을 낮추지 않으면 아무리 법화경을 오래 동안 수행했다 하더라도

결코 법화경 행자 될 수 없다.


정말 법화경 수행하는 사람

부처님 마음과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그렇다.

백팔배 기도 하라고 하는 것도 자기를 낮추라는 뜻이다.


을 하면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을 많이 해서 오히려 아상이 높아지는 사람이 많다.


내가

삼천배 또는 만배했다 하는 이 나오고,


법화경

내가 너 보다 더 오래 했다는 이 나오니까

불법믿는 진의(진실한 뜻)다 도망가 버린다.


여러분들께

부처님마음을 닮아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없이 이야기 하는 이유는

법화경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곧 부처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상묘법연화경하는 이다.


따라서

중생들을 이끌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을 듣는 자는

자기 자신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부처님 마음이 되어야 남도 이끌 수 있지만

부처님의 마음도 되지 않고 내 이익만 쫓는다면 남을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낮게 보아서는 안 되며 모두 부처님으로 보고 존중하면서 을 전해야 한다.


보살마하살 만일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고자 하면

응당 이와 같은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을 닦고 배울지니라


대보살이 부처님지혜성취하고자 하면

이 깊고 깊은 무량의경을 닦고 배우면서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부처님지혜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라는 뜻이다.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부처님 지혜 얻어 뭐 할 것인가?

귀찮게 밤이고 낮이고 공부하러 와야 되고, 또 기도는 무엇 하러 해.

이만큼 잘 사는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가 태어나 사는 이 우주부처님 몸속 것이다.

, 우주 법계부처님이고, 우리는 그 몸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 선언하시기를

모든 사람들은 다 나의 아들

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하며, 부처님자식으로써

부처님가르침믿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량의경 설법품 제이>

반드시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하여 마치시니,

이때 삼천대천세계여섯 가지 진동하고,

자연히 허공에서는 가지가지하늘꽃우발라꽃, 발달마꽃, 구물두꽃,

분다리꽃비오듯 내리며, 또 수가 없는 하늘하늘하늘영락이며

하늘값이 없는 보배허공 위에서 빙빙 돌며 내려와 부처님과 모든 보살

성문 대중을 공양하였음이라.”


부처님께서 무량의경하시니까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로 부처님찬탄하는 모습을

나타내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무량의경주시니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감격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모든 세상이 진동한 것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무량의경해 주시는 부처님 고맙다는 마음의 표시로서

갖가지 하늘 꽃 장식품

그리고

수많은 보배들을 부처님보살,

모여 있는 모든 대중들에게 공양한 것이다.


여기서 꼭 알아야 할 부분

생명 있는 것들이

보살과 성문 대중에게 공양하였다

는 것이다.


처님공양하면 되지 왜 성문대중에게 공양하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범부중생일지라도 바른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무량의경을 닦고 배우면 반드시 부처님 지혜묘법연화경

들 수 있기 때문에 보살성문대중에게 공양을 하는 것이다.


또다시 동방 항하사 등의 모든 부처님 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또한

하늘의 꽃, 하늘의 향, 하늘의 옷, 하늘의 영락, 하늘의 값이 없는 보배,

천주, 하늘의 발우, 하늘의 백 가지 음식, 하늘의 깃대, 하늘의 기,

하늘의 헌개, 하늘의 묘한 악구(樂具)가 비오듯이 내리고,

하늘의 기악을 지어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대중을 찬탄하여 노래를 부름이라.

남서북방 사유상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음이라.”


여기서부터 설법품 끝까지의 내용

부처님께서 무량의경하신 대중들과 생명 있는 모든 것들

부처님찬탄하고 진실마음으로 무량의경을 믿고 받아 가져서 반드시 구원 받아야

한다는 이 들어있다.


반드시 믿고 바른 수행을 하면 얻는 도가 크다.

얻는 경계가 크다는 말이다.


근기에 따라서 얻는 경계나타내신 것이다.

불법을 배우고 닦는데 있어서 게으르거나 물러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물러나지 않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항상 참회하는 마음

부처님바른 실천해 나가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뚜렷한 목표를 정해서 꾸준히 노력하면서 바른 가르침으로

무량의경으로 수행하게 되면

부처님지혜증득해서 결국에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에게 이익을 주게 된다는 뜻이다.


근본에서 이라 함

부처님하고, 근본부처님이며,

부처님의 바르게 행하는 것 근본을 아는 것 된다.


부처님가르침

바른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고 행하면

자기 자신지혜완전하게 갖추어져 마음이 크게 된다.


,

부처님마음이 된다.

이것이 근본이다.


크게 된다는 것 자체가 부처님경지한다.

내가 본래의 부처이기 때문에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믿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가르침근본으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다.


그래야만이

를 얻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바른 가르침 가지고 수행하지 않으면 증득할 수 없다.


부처님일대 50년 설법 가르침을 한 쪽 면만을 보고

그것을 최고라고 하고 이 이상의 없다고 하는 것

 교만한 마음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며 사견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일대사의 법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된다.


노력 없이는

결코 이익을 가져 올 수 없으며, 설사 이익이 조금 생긴다 하더라도

그 이익은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곧 없어지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무량의경법화경바르게 배우라 그래서 강조하는 이유.

 

그 모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대전륜왕 소전륜왕 은륜 철륜 등 모든 윤의 왕,

국왕 왕자 국신 배성 국사 국녀 나라의 장자와 모든 그 권속,

백천 대중이 함께 와서 부처님 여래께서 을 설하심을 들었을 때

혹은 난법(煖法) 정법(頂法) 세간제일법, 수다원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과

를 얻었고, 모든 보살의 무생법인을 얻었으며,

또는 한 가지의 다라니를 얻었고

또는 두 가지의 다라니를 얻었으며,

또는 세 가지의 다라니를 얻었고,

또는 네 가지의 다라니와 , , , , , 열 가지의 다라니를 얻었으며,

또는 백천만억의 다라니를 얻었고,

또는 한량없고 수가 없는 항하사 아승지의 다라니를 얻어서

다 능히 순히 따라 불퇴전의 법륜을 전하며 한량없는 중생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느니라.”


부처님무량의경 설법을 듣고

중생들이 근기에 따라 증득한 것을 밝히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물러나지 않고 보살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무량의경 설법품이 난다.


한 번 더 간추리자면

무량의경에서 42년 동안 설하신 일체 모든 경타박하신 것이다.

, 버리라고 하셨다.


“40여년 미현진실(四十餘年 未顯眞實)”

이는 곧 방편력으로 설한 것이지 진실로서 나타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 진실을 나타내지 않았다.


중생성품욕망기 다르기 때문에

그에게 맞는 설법하신 이 곧 방편력이다.


방편의 힘으로40여 년 동안 화엄경으로부터 아함경, 방등십이부경, 대반야경

했다 하시고

무량의경하시면서 지금까지 하신 모두 다 버려라.”

이렇게 밝히신 것이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부처님께서 40여 년 동안 진실 나타내지 아니 하셨고,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에 설하신 가르침이 말은 같을지라도

그 가지고 있는 뜻은 각기 다르다.

즉 시냇물은 바닷물이 될 수가 없고 시냇물이 샘이 될 수 없고,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없다,

씻어서 때를 없이 하는 것은 이 물이나 저 물이나 똑 같지만

그 물이 가지고 있는 모습과 물이 있는 장소가 다르며

, 러가고 있는 것도 또 다 다르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다.


무량의경배우지 못한 사람은

반야심경, 화엄경, 금강경 최고라고 하는데

은 바로 망어(妄語)라는 것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처님진실한 가르침

이해하지 못하는데서러한 망어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법화경을 한다고 하면서도 법화경진실부처님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멋대로 생각해서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모 어문연구소라고 이름 붙여 법화경가르치는 분

다른 스님들이 해 놓은 것을 발췌한 내용을 담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산승에게 보냈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편지 내용인즉

법화경제목부르라부처님 가르침 없다

는 것이다.


이 내용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법화경 문의(文意)모르는 소이라 본다.

그리고

불교 믿고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생로병사 해탈하는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생로병사를 그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미신이 되어 버린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생로병사이고,

이것은

사제법고제(苦諦)에 해당한다.


사제법에서

처님께서는 해탈하셨지만

고제가 바로 인생이고, 인생 생로병사기도 하다.


그러데 그렇게 이해하면

미신이라니 변견에 치우친 사견이 아닐 수 없다.

,

법화경 제목을 부르라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

모 불교신문에 3개월에 한번 씩 광고를 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산승에게도 똑 같은 뜻으로 보내온 것이다.


아무리 정법을 말해도 그런 사람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성정각(始成正覺)부처님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실성(久遠實成)이라는 의미모르고,


따라서

제목부르라직접적인 말씀이 없어도

문저에 이미 제목홍통하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무량수경 하품하생 보면

대승경의 제목을 염송하라

하신 말씀이 있으며

리나라 최초불교의식집석문의범에서도 대방광불화엄경

이라고 제목을 부르게 한 것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

속 고승전 제17에 보면 천태지의전에서,

사람이 죽기직전에 법화경 제목 부르면

묘법삼력공덕과 힘으로 윤회신(輪廻身)을 받지 않는다.”

고 하셨으며,

고통스런 사람의 몸을 다시는 받지 않는다하신 말씀도 있다.


일심봉청 나무 대승 묘법연화경


천태대사이렇게 제목 봉창을 하셨다.


되지 않아서

일련대사처럼 만 대중에게 제목 부르라고 하지 못한 것뿐이지

이미

천태대사 자신 알고 계셨기 때문 제목 혼자서 부르신 이다.


여래수량품에서

구원본불(久遠本佛)나타내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모르고 시성정각

만 가지고 제목을 부르라없다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래수량품

시호양약(是好良藥) 금유재차(今留在此)

여가취복(汝可取服) 물우불차(勿憂不差)”


금유말법이고,

에 맞춰 말법좋은 양약 로서

묘법연화경 제목나타낸 것이며,

바로 제목을 취복 즉 먹어야 한다고 밝히신 것이다.


먹어야 한다는 뜻은

제목을 입으로 부르는 행이다.


여래수량품보면

눈에 확 띄게 보이는데 그것을 보지 않는다.


,

묘법연화경 여래신력품 제21에서

"여래일체(如來一切) 소유지법(所有之法)

  여래일체(如來一切) 자재신력(自在神力)

 여래일체(如來一切) 비요지장(秘要之藏)

 일래일체(如來一切) 심심지사(甚深之事)”


여래갖고 있는 모든 신력비요지장심심지사가 이 제목 갖추어져

있다 이다.


묘법연화경

'일대사인연법(一大事因緣法)’이라고 하셨으니,


일대사

묘법연화경이요,

묘법연화경이요,

법연화경이다.


그러므로

묘법연화경 인연해서 나오신 분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이런 깊은 모르고

시성정각으로만 해석해서 제목을 부르라는 증문(證文)이 없다고

방법(謗法)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면

불자 여러분들은 성불’즉 바로 이 몸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처라는 알게 되면

마음이 되어야 하고,

부처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낮추어야 한다.

법문듣지 않으면서 읽고 사경하다보면 높아진다.


왜냐하면

법화경읽고 쓰기만 해도 이상하게 힘이 생기니까

높아져 에 대한 배려부족해진다.


내가 내다하는 버리고 나를 낮추지 않고서는

결코 법화경들었다는 의미가 없다.


바르게 공부하면서 바르게 이해해야

이것이 곧 각자 개인의 이익이 됨을 잊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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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相 妙法蓮華經   實相 妙法蓮華經   南無 平等大慧 實相妙法蓮華經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