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의경 십공덕품 제삼①>
무상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길
[불교교단 실상연화종 현광사 석동광스님 법화경(法華經) 해설]
십공덕품은
부처님이 가지고 계시는 열 가지 공덕이 있는데,
불자들도 행하면 부처님처럼 그러한 공덕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때 대장엄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이 미묘하고도 심히 깊고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을 설하시니,
진실로 심히 깊고 깊으옵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오면,
이 대중 가운데 모든 보살마하살과 모든 사중과 하늘·용·귀신·국왕·신민의
모든 중생이 이 심히 깊고도 위없는 대승의 무량의경을 듣고 다라니문과
세 가지 법과 사과와 보리심을 얻지 아니한 사람이 없나이다.
이 경은
문리가 진정하고 존귀함이 이보다 더 함이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바이며,
여러 마구니와 여러 외도가 들어오지 못하며,
일체의 사견과 생사에 헐리어 무너지지 않음을 마땅히 알겠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오면,
한 번 들을지라도 능히 일체의 법을 가지게 되는 고로
만일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들으면 곧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옵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오면,
만일 능히 닦고 행하면
반드시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보리)를 이룩하여 얻기 때문이옵나이다.
중생이 얻어듣지를 못하면
이들은 큰 이익을 잃게 됨이니,
한량없고 가이없는 불가사의의 아승지겁을 지날지라도 결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음을 이룩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겠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오면,
보리로 향하는 크고도 곧은 길을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험한 길을 지나가게 되며,
많은 환란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옵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은 가히 생각하기도 어렵나이다.
오직 원컨대 세존께서는 널리 대중을 위하여
사랑과 애민으로 이 경의 심히 깊은 부사의의 일을 펴시어 설하시옵소서.
세존이시여,
이 경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며, 어디로 가서 머무르나이까.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과 부사의의 힘이 있어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하게 하시나이까.”
‘무량의경을 듣고
다라니문과 세 가지 법과 또 네 가지의 과를 얻고
또 보리심을 얻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이렇게 대장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
여기서 ‘다라니문’이란
모든 악을 떠나서 선한 마음을 가지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나올 때도 있고, 악한 마음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악한 마음이 더 많이 나온다는데 있다.
선한 마음이 나올 때는 아주 적게 된다.
선한 마음이 끊임없이 나오고 악의 마음을 떠나야 하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느냐 하면 바로 자기중심적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내 중심으로 생각해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마음이 생겨나질 않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무시이래로 간직한 탐진치의 업 때문에
자기한테 이익되는 바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악한 마음이다.
좋고 나쁘다는 분별을 떠나서 나를 중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당면한 사물(事物)에 따라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 판단을 했을 때
바른 행동이 나오고, 선함은 그런 곳에서 나올 수 있다.
내가 내 입장에서 내 주관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면
결코 바른 생각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 이것이 중요하다.
‘삼법’은
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을 일컫는다.
일반적인 종교는 깊이가 없다.
물이 초겨울이 되면 살얼음이 언다.
일반적인 종교는 그 살얼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교는 실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중생에 근기에 따라서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가르침까지,
다시 말하면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는 아주 낮은 가르침을 설하시고,
또
근기가 조금 수성하면 또 조금 수성한 만큼의 가르침을 설하고,
또
아주 높은 보살에게는 또 보살에 맞는 그러한 법을 설하신다.
그래서 불도에 들게 길을 가르쳐 준다는 뜻이다.
사과(四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과를 말한다.
수행의 결과로 얻는 경계의 단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 경은
문리(文理)가 진정(眞正)하고 존귀함이 이보다 더함이 없다.’
이 말은
‘무량의경’을 배우지 않으면 불도에 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화엄경’이나 ‘반야경’으로 많이 수행했다 할지라도
무량의경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서는 불도에 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무량억겁의 수행을 한다 해도
결국에는 이 경을 배워야 만이 불도에 들 수 있다,
이 무량의경이 무상보리를 이룩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다,
하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여러 마구니와 외도가 들어오지 못하고,
일체에 사견과 생사에 무너지지 않는다.’
사견(邪見)을 분별할 줄 알아 결코 속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일부 스님 중에는 사견으로 법을 설하는 것을 보고 듣는데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들이 중생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 예로
‘문자를 멀리해라(不立文字).
’ 또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부처님도 조사들이 깨달은 바를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조사를 찬탄한다.’
것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더구나
부처님께서는
‘삼세(과거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다 보신다.’
하셨는데,
조사들이 행한 그 화두 참선 하나 깨달은 것 모르셔서
“그런 도리가 있었느냐? ”
그런 말씀을 하셨겠느냐? 이 것이다.
이런 것이 사견이다.
속히 무상보리를 이룩하여 얻기 때문에 이 경에 들어야 한다.
‘속히’라는 말은
빨리 한다는 뜻이 아니고, 한길, 하나의 길이라는 뜻이다.
오직 한길로 수행함으로써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한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묘법연화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한길’로 가야 된다는 뜻이다.
무량의경을
제대로 닦아야 법화경에 들 수 있다는것이다.
무량의경을 모르고 법화경에만 들게 되면
묘법연화경도 다른 경과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경을 보더라도 그 나름대로 “이 경이 최고다.” 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에도
역시 “이 경이 최고다.” 라고 해놨으니까 다른 경하고 똑같다고 생각한다.
한편
법화경은 ‘다만 공덕은 수승하다.’ 이렇게 취급하고 만다.
다르게 말하자면 매도(罵倒)를 해 버린다.
“한량없고 가이없는 불가사의의 아승지겁을 지날지라도
결국은 무상보리를 이룩하지 못한다.”
는 것은 인연과보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화엄경과 반야경을 아무리 오래 한다 해도 무상보리 이룩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42년 동안 설한 가르침으로서는
아무리 무량억겁을 수행한다 해도 무상보리를 이룩하지 못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보리로 향하는 크고도 곧은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이 한길을 모르기 때문이라.
그래서 무량의경은 실로 생각하기도 어렵다.
“오직 원컨대 세존께서 이 대중을 위하여 사랑과 애민으로 이 경의 심히 깊은
부사의의 일을 펴서 설하시옵소서.”
하고 대장엄보살마하살이 모여 있는 대중을 대표하여 부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 가운데는
‘묘법연화경 설해 주십시오.’
하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길 들어가는 그 길을 설해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한길의 목적지,
즉
‘무상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길 그것을 열어 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험한길을 지나가게 되며 많은 환란에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옵나이다.”
이처럼
인연 과보를 설하신 것인데,
여기서 인(因) 수행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큰 이익을 잃게 된다는 뜻이고,
연(緣)은 가르침이 된다.
과(果)는
무상보리를 이루는 것이고,
보(報)는
무상보리를 이루게 됨으로써 일체를 이익되게 함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게 이익되게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수행하면
무상보리를 이룩해서 일체 세간과 출세간에 이익을 주게 된다는 뜻이 된다.
무량의경 십공덕품 제삼②
무량의경의 첫째 공덕과 부사의의 힘
세존이시여,
이 경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며, 어디로 가서 머무르나이까.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과 부사의의 힘이 있어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하게 하시나이까.
그 때 세존께서 대장엄보살마하살에게 이르시되,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야, 이와 같고 이와 같음이니 네가 말한 바와 같음이라.
선남자야,
내가 이 경을 설함이 심히 깊고도 심히 깊으며 진실로 심히 깊음이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하게 하려는 까닭이며,
한 번 들으면 능히 일체의 법을 가지게 하는 까닭이며,
모든 중생에게 큰 이익을 주려는 까닭이며,
크고도 곧은 길을 가게 하여 환란에 머무름이 없게 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야,
네가 이 경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며, 어디로 가서 머무르는 것을 물었느냐.
마땅히 자세히 들으라.
선남자야,
이 경은 본래 모든 부처님의 집으로부터 와서,
일체 중생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데로 가고,
모든 보살이 행하는 처소에 머무름이라.
선남자야.
이 경은 이와 같이 와서, 이와 같이 가고, 이와 같이 머무름이라.
이런 까닭으로 이 경은 능히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과 부사의의 힘이 있어
중생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룩하게 하느니라.
선남자야,
너는 또 이 경의 열 가지 부사의의 공덕과 힘이 있음을 듣고자 하느냐.
대장엄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원컨대 즐겁게 듣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선남자야,
첫째
이 경은 아직 발심하지 못한 보살에게 능히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며,
인자함이 없는 자에게는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살생을 즐기는 자에게는 대비심을 일으키게 하며,
질투하는 자에게는 따라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애착이 있는 자에게는 능히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모든 것을 아끼고 탐내는 자에게는 보시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교만함이 많은 자에게는 지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성을 잘 내는 자에게는 인욕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게으른 자에게는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모든 것에 산란한 자에게는 선정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어리석음이 많은 자에게는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아직 제도 안 된 자에게는 제도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열 가지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열 가지의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유위를 즐기는 자에게는 무위의 마음을 뜻하게 하며,
물러서려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는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하며,
누가 있는 자에게는 누가 없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번뇌가 많은 자에게는 제하여 없애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이 경의 첫째의 공덕이요, 부사의의 힘이니라.”
무량의경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서 머무르는 지를 대장엄보살이 질문을 하니
부처님께서 답변을 하시기를,
“이 경은 본래 모든 부처님의 집으로부터 와서,
일체 중생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데로 가고, 모든 보살이 행하는 처소에 머문다.”
하신 것이다.
‘부처님 집’이란
일불승인 ‘묘법연화경’을 뜻한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가 이 경(묘법연화경)에서 출세를 하느니라.”
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묘법연화경이 집이 되는 것이다.
‘일불승으로부터 와서 일체 중생들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해서
다시 일불승으로 들어 가게 하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이 무량의경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법화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묘법연화경이 진리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우주상에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게 바로 부처님 집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 집에서 나와 가지고 많은 중생들에게 법을 펴
그 중생들이 보리심을 닦고자 하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부처의 지혜에 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서
이 무량의경을 닦아 가지고 바로 다시 부처님의 집인 일불승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 사천 법문인 팔만대장경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면
이 묘법연화경에서 나와 다시 묘법연화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 부처님 법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는데 왜 그 수많은 법을 설했는가?
중생의 근기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걸 전부 다 말씀하시고자 하다 보니까
결국은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설하신 목적이 어디 있는가?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본래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 갈 곳은 하나밖에 없다.
본래 묘법연화경 하나밖에 없다.
진리가 묘법연화경이다 하는 것이다.
진리가 묘법연화경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수많은 법을 설하시고
난 다음에 다시 열반에 드시기 전에 8년간 ‘묘법연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무량의경’은
‘묘법연화경’에 들게 하기 위해서 설하신 경[開經개경]이고,
무상보리를 이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경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이다.
무량의경을 반드시 배우고 닦아야 우리는 공덕을 얻을 수 있다.
그 공덕은 환희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 그런 경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바르게 알아서 닦아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 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 변해 갈 수 있다.
무량의경을 닦으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경문에 있듯이
“교만함이 있는 자에게는 지계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교만 때문에 무상보리에 들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무간지옥을 벗어날 길이 없다.
아무리 수행을 한다 해도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발심하지 못한 보살을 능히 보리심을 일으키게 한다.”
라고 한 부분은 무량의경을 제대로만 배우면 전부 이 법에 들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
“인자함이 없는 자에게는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면 인자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내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매사를 이끌어 나가려고 하면 안 된다.
자신이 행한 말이나 행동을
늘 점검해서 잘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스님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자기 자신은 ‘완벽하다’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다.
절대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수행을 바르게 해 나감으로 인해서 거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뜻인가
하는 것을 잘 배워가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소 바르게 되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바르게 한다 해도 자기 주관에서 바른 것이지
3자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바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그런 사람이 완성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을 잘 내는 자에게는 인욕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이 무량의경을 바르게 하면 성을 내다가도
‘내가 무량의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공부 안하는 사람은 그건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성찰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 내가 아니로구나! 뭔가 잘못이다.’
또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볼 때 바른 분별력이 생겨서 인욕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게으른 자에게는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게으른 자는 이 공부를 하기 어렵다.
오늘 날도 추운데 하루 안 들으면 어떨까?
하루 절에 안 가면 어떨까?
자기 합리화를 많이 하게 된다.
가끔 때에 절은 누더기 옷을 걸친 수행자를 보는데
어쩌면 철저한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는 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행자는 마음과 겉이 청정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이 청정하면 겉도 청정하게 되어 있기 마련이다.
비단옷을 입으란 것이 아니다.
자주 빨아 입으란 말이다.
몸에서 냄새가 나면 귀신도 싫어한다.
그래서 악귀가 침범하게 된다.
장애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몸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수행자에게 마늘 같은 오채(五彩)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다.
“산란한 자에게는 선정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마음을 바른 곳에 붙이지 못하는 사람 -
요것 해 볼까?
저것 해 볼까?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요 철학관이 잘 보는가?
저 철학관이 잘 보는가?
저 스님이 뭐 좀 아는가?
이 스님이 아는가?
- 하는 것이 산란한 마음이다.
산란한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한곳에 두지 못하니까 공부가 안 된다.
문을 꼭 잠갔는가?
안 잠갔는가?
오만 생각 다 한다.
몸은 여기 앉아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니 스님의 법문이 안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되며, 무슨 선정에 들 수 있겠는가.
“어리석음이 많은 자에게는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불교에 대해 잘못 이해했던 부분들이 다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 경 공부를 바르게 하면 아, 이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처럼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
“아직 제도 안 된 자에게는 제도되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이 법문을 마음을 열어놓고 듣고 ,
또는 우연히 법문을 한 번 딱 들었다 하면 그 사람은 제도 되어 있지 않지만,
그걸 받아 들였기 때문에 제도 되고자 하는 그 길이 열린다.
그러니까 내가 제도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다시 가서 공부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열 가지의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열 가지의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천수경에 보면
십악(十惡)이 열거 되어 있는데. 열 가지 죄를 십악이라 한다.
이 열 가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열 가지 착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유위(有爲)를 즐기는 자에게는 무위(無爲)의 마음을 뜻하게 한다.”
있다 없다 하는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특히
있다는데 집착을 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하다가
마구니 형상을 보면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끌려가기 쉽다.
하지만
무량의경을 닦으면
‘아 이게 아니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물러서려고 하는 자에게는 물러서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 무량의경을 바르게 배우면
이 법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게 된다.
법의 힘이 생겨서 자연히 마음이 굳건하게 되는 것이다.
스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셔도
‘저는 여기서 안 떠납니다.’
이런 마음이 생겨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바르게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누가 있는 자에게는 누가 없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번뇌가 많은 자에게는 제하여 없애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느니라.”
번뇌와 ‘누’는 비슷한 말인데,
이 경을 바르게 열심히 수행하면 누를 없애고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잘 못 되었다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행한 말이나 행동이 잘 못 되었다 하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못 된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행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이
부처님의 부사의의 힘으로 무량의경을 수행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첫 번째 공덕인 것이다.
<무량의경 십공덕품 제삼③>
얼마나 좋고 신나고 즐거운 일인가
“선남자야,
둘째
이 경의 불가사의의 공덕과 힘이라 함은 만일 중생이 이 경을 얻어
혹은 한 번이라도 혹은 한 게송 또는 한 구절을 들으면,
곧 능히 백천억의 뜻에 통달해서 한량없는 수의 겁을 두고도 받아 가진 법을 능히 연설하지 못하느니라.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 법의 뜻이 한량없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야,
비유하건대 이 경은 하나의 종자에서 백천만이 나오며,
백천만의 하나하나 가운데서 다시 백천만의 수가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전전해서 한량없음과 같이 이 경전도 또한 이와 같아 한 법에서 백천의 뜻이 나오며,
백천의 하나하나 뜻 가운데서 다시 백천만의 수의 뜻을 내나니,
이와 같이 전전해서 또 한량없고 가이없는 뜻이 있음이라.
이런 까닭으로
이 경의 이름이 무량의경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이 경의 둘째의 공덕이요, 부사의의 힘이니라.”
하나하나의 뜻에서 백천만억의 수없는 뜻이 나온다 하셨다.
하나의 종자에서 백천만이 나오고, 백천만의 하나하나 가운데서
다시 또 백천만억의 수가 다시 나온다 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로 이 경도 또한 한 법에서 백천의 뜻이 나온다고 하신 것이다.
한 법이란
묘법연화경이다.
그 가운데는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뜻이 들어 있다.
아무리 교묘하게 설명을 한다 해도 그 설명을 다 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곧 부처님의 지혜로서 법이 되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
이 문구를 가지고 선(禪)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천칠백 공안을 내세워서
하나하나 조사가 화두를 깨쳐 나타내면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은
그런 도리가 있었느냐 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부처님께서 모르시는 경계가 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사견 중에 사견이다.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대법왕이신 부처님께서 어찌 모르시는 것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지혜는 실로 무량하며, 이 무량한 뜻이 이 경에 다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경은 실로 부사의한 힘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무량의경을 닦아 행하는 것이 두 번째 공덕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선남자야,
셋째
이 경의 불가사의의 공덕과 힘이라 함은
만일 중생이 이 경을 얻어들어 혹은 한 번이라도
혹은 한 게송 또는 한 구절을 들으면,
백천만억의 뜻에 통달해서
비록 번뇌가 있을지라도 없음과 같으며,
생사에 나고 들고 할지라도 겁나고 두려운 생각이 없느니라.
모든 중생에게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을 내며,
일체의 법에 용건한 생각을 얻느니라.
억센 힘이 센 자가 있어 모든 무거운 것을 짊어지거나 능히 가짐과 같이
이 경을 가지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능히 무상보리의 무거운 보배를
짊어지고 중생을 업고 생사의 길에서 벗어나옴이라.
아직 스스로는 제도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능히 저들을 제도하리니,
오히려 뱃사공이 무거운 병에 결려 있어 팔과 다리가 자유롭지 못하여
이쪽 언덕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튼튼한 좋은 배와 건너는 도구 모두를 그들에게 주어서
떠나보내는 것과 같이 이 경을 가지는 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비록 다섯 가지 도의 모든 것이 있는 몸이 백팔의 무거운 병에 걸려 항상 서로 얽혀서
무명과 늙고 죽음의 언덕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견고한 이 대승의 무량의경은
능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설해 있으니,
설함과 같이 행하는 자는 나고 죽음에서 제도됨을 얻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이 경의 셋째의 공덕이요, 부사의의 힘이니라.”
세 번째 공덕을 말씀하셨다.
한 구절을 들으면 백만억의 뜻에 통달해서 번뇌가 있을지라도 없음과 같다.
설사 번뇌가 있다 손 치더라도 이는 없는 것과 같다.
생사에 나고 들고 할지라도 결코 두려움이 없어진다.
중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의 고통이야말로 육체로써 어떠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무량의경을 수행하면 생사에 나고 들고 하더라도 겁나고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르게 행하면
죽음을 앞두고라도 결코 두려움도 없고,
죄 많고 업 많은 이 몸뚱이를 버리는 것일 뿐,
이 법에 들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이 경은
무상보리라고 하는, 부처님의 지혜로 중생의 무거운 업보를 짊어지고
중생을 업고, 생사의 길에서 벗어난다.
보배는 부처님의 지혜이며, 진실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가지고 중생들에게 가르쳐서 중생들이 그 중생의 업보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좋고, 신나고 즐거운 일인가.
살아가는데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인상을 쓰고 있다 한들 누가 돈 갖다 주나?
또 아무리 내가 어렵다. 어렵다 한들, 겉으로는 공감하면서도 속으로는 도와 줄 수도 없는데
그런 소리하면 마음만 아프지 뭐! 이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워도 어렵다 할 것이 아니라 묵묵히 다만 열심히 행하면 된다.
열심히 살면 길이 열린다.
믿음을 확실히 가지고 기도를 하면 반드시 먹고 살아갈 길이 열린다.
욕심 때문에
자꾸 문제가 생겨나서 그렇지, 편안한 마음 가지고 생활하게 되면
기필코 이익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걱정 안하고 사는 것이 최고의 이익인데,
중생들에게는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정말 지극하게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실천을 했을 때는
반드시 때가 되면 이익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우선 남을 미워하는 마음 버리고 말조심을 해야 된다.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남을 비방하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남이 행한 일에 대해서 잘했다 못했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모두 자기한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뱃사공 얘기가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마음씨 착한 사람이 뱃사공을 하고 있는데, 돈을 못 받아.
말하자면
요새 일해 놓고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해 돈 못 받는 사람과 똑 같아.
뱃사공이 뭐 먹고 사나.
배 삯을 받아서 먹고 산다.
그런데 태워주기는 태워줘.
태워주는데 태워주고 나면 정해진 돈도 있는데 자기 멋대로 주고 싶은 대로 주고 가버려.
아예 안 주는 사람, 또 줘도 적게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이 뱃사공이 돈을 못 벌어.
근데 어느 날 스님이 턱 오니까, 아 그 뱃사공이 돈을 못 벌어서 먹고 사는 것도 어렵고 하니 초췌하거든.
그러니까 뱃사공의 마음을 알고,
어이 뱃사공 나를 저 건너까지 배를 태워 주겠소?
예 태워 드리죠.
내가 건너가면 뱃삯을 주겠소.
그래서 배를 탔다.
배를 건네주고 스님에게 돈을 달라니까 돈이 없다 하거든.
돈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니까
그 대신에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길이 뭡니까?
배 건너기 전에 미리 돈 받고 건너 주라고 가르쳐 주었다.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범부들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
강을 건네주고 삯을 달라하니까 그냥 가 버리고,
또 힘센 놈은 눈 부라리고 하니 무서워서 돈 달라는 소리 못하고,
이런 일이 많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걸 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것이라도 그걸 예사롭게 보게 되면
늘 잊어버리고 넘어가게 된다.
작은 것 즉 무슨 얘기냐 하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고통을 받을까,
받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말해야 되는 것이다.
중생들이
이 무량의경을 배워 가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이익이 온다는 뜻이다.
“선남자야,
넷째 이 경의 불가사의의 공덕과 힘이라 함은
만일 중생이 이 경을 얻어들어 혹은 한 번이라도 혹은 한 게송이나
또는 한 구절을 들으면 용건한 생각을 얻고,
비록 스스로 제도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능히 다른 사람을 제도하느니라.
모든 보살과 함께 권속이 되며,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항상 이 사람을 향해서 법을 설하심이라.
이 사람이 듣고 능히 다 받아 가지고 순히 따라 거역하지 아니하고,
다시 사람을 위하여 당연함을 따라 널리 설함이라.
선남자야,
이 사람은 비유하건대 국왕과 부인에게서 새로이 왕자를 낳음과 같음이라.
혹은 하루 혹은 이틀 혹은 이레에 이르거나,
혹은 한 달 혹은 두 달 혹은 일곱 달에 이르며,
혹은 한 살 혹은 두 살 혹은 일곱 살이 됨이라.
비록 나라의 일을 맡아서 다스리지 못할지라도
신하와 백성에게 이미 숭상과 공경을 받게 되며,
모든 대왕의 아들과 같이 짝을 짓게 되느니라.
왕의 부인과 사랑하는 마음이 치우쳐서 항상 같이 말하리니 어찌하여 그러한가.